구순을 앞둔 화가 김창열은 요즘도 그만의 유일무이한 오브제인 물방울 하나를 그리기 위해 사방이 막힌 작업실에 스스로를 가둔다고 한다. 비록 몸은 공간에 묶여있지만 캔버스에 그리는 물방울에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화가의 말에 무심코 보이던 우리집 수도꼭지에 매달린 물방울 하나의 무게가 가볍지 않게 느껴진다.
이처럼 사유의 시선을 담은 그의 물방울은 마치 영혼의 갈증을 달래는 생명수처럼 구슬구슬 화폭에 맺혀있다. 그것은 외부의 빛이 차단된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재발견한 삶의 가치를 끝내 이미지란 시각적 언어로 완성시키는 사진가의 자세와도 비슷하다.
매년 겨울 뉴욕에선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디자이너이자 우리에게도 친숙한 브랜드인 ‘폴로’의 창업주 랄프 로렌(Ralph Lauren)의 런웨이가 패션위크 Fashion Week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다. 랄프 로렌의 명성에 걸맞게 그의 패션쇼에 초대받은 전 세계의 유명 인사들과 패션 에디터들은 맨하튼 남쪽 워싱톤 스트릿의 한 창고건물에 모인다. 요맘때면 거리를 뒤덮는 폭설에 얼어붙는 촬영 장비를 애써 녹이며 현장의 주변에서 추위를 견디는 사진가들의 수고엔 고통이 더 깊어지기 마련인데, 한 장의 완벽한 순간을 담기 위한 이들의 취재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두마(Duma)! 두마! 여길 좀 봐요! 여기!”
패션쇼가 끝나자 길가에 쏟아져 나온 인파들 사이 한 유력 패션지의 러시아 기자 출신인 미로슬라바 두마(Miroslava Duma)가 모습을 드러낸다. 업계에선 이른바 ‘끝판왕’으로 정평이 나있는 두마만의 스타일을 포착하려 사진가들은 저마다의 렌즈를 앞세워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외친다. 3년 전 작고한 길거리 패션 사진의 전설 빌 커닝햄(Bill Cunningham) 사진가도 보인다. 언제나처럼 파란색 점퍼를 갖춰 입은 그에게선 팔순을 넘긴 고령임에도 여전히 남다른 촉이 느껴진다. 눈밭에 요정처럼 나타난 두마의 결정적 한순간을 기다리는 이 노련한 사진가의 자세에서, 김화백의 물방울이 떠오른다.
촬영장소: 뉴욕.
파리, 런던, 밀라노 컬렉션과 함께 세계 4대 패션위크 중 하나인 뉴욕 패션위크는 매년 2월과 9월에 열린다. 랄프 로렌, 도나 캐런, 토미 힐피거 등 미국의 대표 패션디자이너들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유망한 디자이너들은 패션쇼와 파티 등 다양한 행사틀 통해 업계의 관계자들과 대중들에게 다음 시즌을 겨냥한 새로운 개념을 담은 의상을 발표한다. 초청만으로 입장이 가능한 패션쇼 외에도 남녀노소 상관없이 각자의 개성과 스타일을 살린 이들이 현장 주변에 모여들어 볼거리를 더한다.
작가 소개: 윤한구
© JFM-HANKOO YUN_B&R_202001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작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으며, www.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