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키르키즈스탄의 무척 외진 산골에서 마땅한 숙소를 찾지 못해 한 민가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적이 있다. 길손을 귀하게 여긴다는 이 나라 유목민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집주인과 그의 가족은 불쑥 도움을 청한 낯선 이방인을 살갑게 대접해 주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이 되자 어디선가 탄식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집안을 둘러보니 교복을 차려입은 주인집 딸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는데 언니가 만진 머리모양이 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곧이어 바깥에선 어깨에 책가방을 둘러멘 오빠가 늦었다며 투덜투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름과 함께 제주도의 집 근처 길모퉁이에 수국이 활짝 폈다. 한 엄마는 미소를 머금은 아이들을 그 앞에 모아놓고 스마트폰 화면에 차곡차곡 아이들을 담았다. 아침잠이 많은 딸의 늑장 탓에 한시가 급하게 차에 오르기 바쁜 우리 부녀의 등굣길 분위기와 다르게 그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우린 언제 그들처럼 느긋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의 하루는 이렇게 딸의 등교와 함께 시작한다.
얼마 전부턴 딸을 학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인적이 드문 호숫가에 들러 잠시 산책을 하곤 한다. 허튼 시간이 되지 않도록 나름 세 가지 원칙을 마음에 품고 이곳을 찾는다. 그 원칙이란 첫째는 ‘내려놓기’이고, 둘째는 ‘채워가기’이다. 첫째와 둘째가 마음가짐에 대한 원칙이라면 마지막 셋째는 걸음걸이에 관한 것인데, 이것이 내겐 가장 지키기 어려운 원칙이기도 하다. 산책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의식의 흐름대로 호수 밖 세상의 시간에 맞춰 바빠지곤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의 두 원칙들이 잘 지켜지지 않을 때 이 원칙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곳에 적절한 나만의 걸음을 되찾아야만 비로소 눈에 담기는 호수의 내밀한 비경에서 치유의 순간을 맛볼 수 있다.
“Not quite my tempo!” (내가 원하는 그 박자가 아니야!)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위플래쉬’의 주인공인 최고의 재즈밴드를 지휘하는 플레쳐 교수가 그의 제자들을 다그칠 때 수없이 던진 외마디 대사다. 스승이 원하는 박자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를 견디지 못한 몇몇 제자들은 끝내 밴드를 떠나기도 한다. 이따금 플레처의 대사가 호숫가를 걷다 무심코 빨라지거나 처지는 나의 발걸음을 향한 경고음처럼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아침마다 딸과의 엇박자 속에 치르는 전쟁 같은 등굣길에, 사진 속 키르키즈스탄의 산골마을 소녀를 조르는 오빠의 등굣길에서 왠지 다급한 외침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다.
촬영장소: 키르키즈스탄.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으며, 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