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무역항, 나가사키
나가사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나가사키 짬뽕? 카스테라?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나가사키는 일본 남단 규슈에 속해 있는 도시이다. 짬뽕과 카스테라가 유명해진 이유는 나가사키가 일본 최초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곳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음식으로만 기억되는 나가사키, 이곳으로 B&R from Nature 두번째 여정을 떠나보자.
나가사키의 세가지 비밀
나가사키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몇 가지 비밀이 있다. 첫째는 개항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들어와 포교 활동을 펼치기 시작해서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곳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기독교인 비율은 전체 인구에 2%에 그친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엄청나게 증가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전대미문의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 수 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서나 교회와 성당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그당시 지어진 성당을 시내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도시이다.
두번째로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이다. 히로시마에 위치한 원폭 유적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세계가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은 아름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도 있지만 이처럼 인간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문화유산도 있다. 여기에는 핵무기의 폐해를 알리고 인류 평화를 추구하자는 다짐이 담겨있다. 나가사키에도 원폭 기념관이 있어 일본의 전쟁 야욕과 세계 평화를 명목으로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이 가져온 참혹한 결과를 되돌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요즘 많이 알려지고 있는 하시마섬, 일명 군함도가 바로 나가사키 에 있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으로 알려지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아파할 슬픈 역사가 숨겨져 있는 비밀의 섬이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고도 9600미터 상공에서 원자폭탄 한 발이 떨어진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뒤에도 일본 정부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원폭을 투하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약 7만 4천여명. 부상당한 사람도 7만 5천명이나 되었다. 당시 나가사키 인구가 19만 명이 조금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전체 인구의 40%가 목숨을 잃었고 이후에도 원폭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
왜 나가사키인가?
1938년 독일에서 핵분열을 발견한 이후 미국은 1942년 당시 일본 국가 예산 보다 많은 거액의 비용을 투자하여 원폭을 개발했다. 원폭은 2차 대전 종식을 위해 독일을 대상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자살 이후 독일은 항복했으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 일본으로 그 목표가 변경되었다. 오사카와 교토 등 17군데가 후보지로 올랐으나 대도시에 투하할 경우 희생이 커질 것을 우려해 군사 거점이 되는 도시인 히로시마에 1945년 8월 6일에 투하되었다. 하지만 원폭이 투하된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8월 9일 기타큐슈의 고쿠라 지역을 정했으나 그날 그곳 기상이 좋지 않아 제 2목표였던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B&R from 나가사키
나가사키. 나는 사실 이 도시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이 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했다. 혼자서 일주일 동안 나가사키에 머물면서 나가사키와 그 주변 도시들을 여행했다.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된 B&R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나가사키 원폭 기념관 (Atomic Bomb Museum)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나가사키 원폭 기념관. 나가사키 역에서 전차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이 기념관은 원폭 투하 지점에서 15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 900여점의 원폭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버섯 모양의 구름이 생기고 강력할 폭발로 인한 폭풍과 열, 그리고는 방사선으로 사람 뿐만 아니라 건물, 동식물이 초토화되었다. 원폭 투하 전의 나가사키시의 사진과 원폭 투하 후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그때의 폭발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 수 있다. 원폭 자료관에서는 원폭이 터지고 난 후에 발견된 물건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원폭 지점 근처에서 발견된 시계인데 원폭 투하 시간인 11시 2분에 멈춰져 있다. 심하게 일그러진 시계와 강한 열에 녹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로사리오는 그때의 참혹했던 순간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원폭이 투하되고 나서 도시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열로 녹아버려 숯검댕이가 된 시체와 화상을 입은 사람들로 도시는 생지옥이 되었다. 자료관에는 그때 당시의 사진들을 전시해 원폭의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려준다.
원폭 낙하 중심지 (Hypocenter Cenotaph) 공원
바로 이곳이다. 무시무시한 원자 폭탄이 떨어진 곳. Ground Zero. 폭탄이 떨어진 그곳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기둥이 있고 그 주변을 큰 원으로 표시해놓았다. 원폭이 투하되고 난 뒤 그 주위 2. 5km 반경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고 한다.
우라카미 성당은 기독교 탄압의 시대를 견디고 유배지에서 돌아온 신도들이 후미에가 행해지던 집터를 사들여 허물고 1873년에 건립한 성당으로, 원폭이 터지기 이전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붉은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30여년에 걸쳐 완성한 이 아름다운 성당은 피폭 중심지로부터 북동쪽으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강력한 폭팔로 인해 성당에서 미사를 들이던 신부님과 교인들은 모두 그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건물은 초토화 되었다.
원폭 중심지에는 그때 당시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성당의 기둥이 옮겨져 있다. 원래는 무기 공장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이었으나 흐린 날씨 때문에 위치를 잘못 조준하여 미사가 진행중이었던 우리카미 성당 근처에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우라카미 성당은 원폭 투하로 사라져 버린 성당을 재건해서 다시 지은 것이다. 하지만 원폭 투하로 망가져버린 성인들의 조각은 그대로 두었는데 돌도 날려버리고 녹여버리는 원폭의 강력한 위력을 눈으로 볼 수 있다.
평화 공원 (Peace Park)
지상 500미터 상공에서 작렬, 폭풍과 열선과 방사선으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75년간 초목이 나지 않는다고 일컬어졌던 이 땅에 지금은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원폭 낙하 중심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받은 평화를 기원하는 조각작품들로 둘러쌓여져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세계평화를 호소하는 기념 공원이 되었다.
평화 공원의 상징인 평화 기념상. 오른손은 높이 하늘을 향해 쳐들어 원폭의 위협을 왼손은 수평으로 뻗어 세계 평화를 뜻하고 있으며 살짝 감은 눈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있다고 한다.
나가사키 형무소 우라카미 지소에는 원폭이 터질 당시 간수를 포함해 죄수 134명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즉사했다. 특히 그곳에는 징용온 조선인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한쪽에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으로 몸 속 깊이까지 타버린 피폭자들은 “물…물…”하고 신음하거나 울부짖으며 죽어갔다. 고통 속에서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며 그 곳에 평화의 샘 분수대가 건립되어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최고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최고가 되어야만 하는 욕심. 그래서 과연 최고가 되었는가? 남의 것을 빼앗아서 지금 행복한가? 이 기념관은 우리에게 전쟁이라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바보같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지내기에도 짧은 인생이라는 것을, 왜 인류는, 역사는 그리 자주 잊어버리는 것일까?
글.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