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마섬(군함도)은…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항 근처에 위치한 섬으로 그 모양이 일본의 해상 군함을 닮아 일명 ‘군함도(軍艦島)’라고도 불린다. 19세기 후반 미쓰비시 그룹이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이곳을 개발하여 탄광 사업으로 큰 수익을 올렸다. 1950~60년대 일본 석탄 업계가 침체되어 1974년 폐광된 후 현재는 무인도로 남아있다. 군함도는 일본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져 2015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지만 사실1940년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당한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사진 한 장으로…
나가사키의 첫인상은 이국적이면서도 일본스러운 전통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느낌의 도시였다. 보통 소도시 공항에 도착하면 입국 수속을 위해 이동하는 통로에서 그지역의 유명한 장소나 특산품 사진들을 보게 돠는데 나가사키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때 유달리 기억에 남는 포스터 한장이 있었다. 고요한 바다 위에 독특한 모습으로 떠 있는 한 섬의 사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 민족에겐 아픈 상처를 남겨준 하시마섬의 사진이었다. 유네스코 등재를 기점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식민지 시절 어두웠던 이야기가 수면으로 올라오게 되었지만, 당시 내가 보았던 그 사진 한 장은 내가 이 도시를 재방문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강제 징용으로 일본 산업화의 제물로 외롭게 죽어갔을 우리네 선조들의 마음을 느껴보고자 두번째 찾아오게된 나가사키. 그 아픈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보려 한다.
하시마 섬에 입도하려면…
여행을 떠나기전 인터넷을 통해 군함도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그때는 아직 국내에서 이목을 끌기 전이어서 방문했던 한국인들도 거의 없어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일본 근대 산업화의 상징적인 장소로 소개되면서 일본인들과 외국인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있는 관광 상품이어 표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시마섬은 나가사키항에서 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혼자서는 이 섬을 여행할 수 없고 반드시 투어 프로그램으로 통해 입도해야 한다. 나가사키항 여객 터미널에서 세 개정도의 회사가 군함도 투어 상품을 팔고 있는데 보통 인터넷이나 전화로 예약한 후 현장에서 지불하는 방식이였다.
티켓을 받아들고 선착장에 갔는데 예상보다 많은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승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본인들 사이에 서양의 외국인들도 간간히 보였는데 아무리 봐도 한국인은 역시 나 혼자였다.
하시마 섬으로 출발
쾌속선은 금새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배가 출발하자 중년의 여성 가이드가 열심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주로 일본근대화와 섬에 대한 소개, 유네스코 등재 배경과 축하 메세지, 석탄 채굴을 위해 그곳을 개발한 미쓰비씨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쾌속선을 타고 30분정도 가면 섬이 하나 나온다. 하시마섬에는 화장실이나 매점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내려 음료와 화장실을 해결한 후 다시 20분 정도를 달리면 망망대해 한가운데 군함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섬을 향해 달리던 배가 섬이 잘보이는 방향 쪽으로 회전해서 승선객들을 위해 선상 포토타임이 주어진다. 곧이어 배는 포구에 정박했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배에서 내리게 된다.
투어 상품은 세 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관람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30분, 60분, 120분의 총 세가지 상품에 가격은 4천엔, 6천엔, 8천엔 정도이다. 내가 구매한 티켓은 60분짜리 상품으로 두 군데 정도의 장소를 볼 수 있는 상품이였다. 90분짜리 티켓도 관광을 할 장소는 두 군데로 제한되어 있는데 장소를 제한하는 이유는 구조물들이 오래되어 붕괴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섬의 두 얼굴
하시마섬은 작은 무인도를 몇 번이나 매립하고 확장하여 원래 면적보다 3배의 크기가 되었다고 한다. 섬이 작은데다 극히 제한적인 공간을 이동하며 관람을 하다보니 실제 보는 것보다 가이드의 설명이 상대적으로 길었다. 관람할수 있는 부분에는 펜스를 쳐놓고 그 안에 모여서 관람을 하는 형식이었다. 이곳 저곳 볼 수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섬의 한 귀퉁이만 공개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인 관광이었다.
해저에 석탄이 있다는 것이 발견된 이후 미쓰비시가 투자를 시작하면서 섬과 광구의 권리를 구매했다. 그리고는 대규모 해저 탄광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채탄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들도 증가했고 늘어나는 인구를 좁은 섬에 수용하기 위해 일본 최초의 철근 고층 아파트까지 건설되었다. 이 작은 섬에 인구가 5200명까지 증가했는데 당시 세계 최고의 인구밀도를 가진 섬이였다.
가이드는 그 당시 섬의 선진화된 생활상 등에 촛점을 맞춰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의 아파트 라든지 그 시대에 부유하고 근대화된 장소, 예를 들면 야외 풀장 자리 등을 설명해주었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섬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 TV를 갖고 있을 정도로 부유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산업의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변해가면서 마침내 탄광은 폐광을 하게 되었고 주민들이 감소함에 따라 섬은 무인도로 변해갔다.
투어는 유네스코 등재로 인해 투어는 즐거운 분위기로 이어졌고 이 섬이 일본 근대화의 주축으로 설명되면서 마치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었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가이드의 말, 그 어디에도 해저 깊은 곳에서 허리도 펴지 못한채 먹지도 못하고 하루 12시간씩 45도가 넘는 온도에서 석탄을 캐야 했던 조선이 노동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렇게 한시간의 투어가 끝나고, 번영했던 섬의 한 귀퉁이만을 본 채 선착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옥섬, 감옥섬
탄광 지역도 보지 못하고 가이드에게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사실 하시마섬은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고 불리웠다.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으로 조선의 젊은이이 강제로 끌려간 곳. 이 섬 어디에서도 그들의 흔적은 없었다.
석탄 채굴시 작업 공간이 좁아 노동자가 서 있기도 힘든 곳이었다. 이처럼 열악한 채굴 조건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붕괴 사고, 영양실조 등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로 가족과 헤어진 채 억울하게 죽어갔다. 일부는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높은 파도에 휩쓸려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터지고 나서는 조선인들이 파괴된 거리를 복구하는 일에 동원되어 무방비로 방사능에 노출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고도 어떤 사과도, 어떤 보상도 없었다. 고국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죽어갔을 우리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섬을 떠나기 전 작게나마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읊조려 보았다.
그들을 잊지 말아주기를, 그들을 기억해주기를… 어쩌면 그들은 바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기억하며 그런 일이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게 기도하며 힘쓰는 것 뿐. 그리고 내 옆에 가족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감사하는 것 뿐…
글. 김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