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고미술품 거래의 요람인 헐리우드 로드. 모든 걸 잃은 듯 보이는 허름한 외모의 노인이 이곳의 한 상점 앞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지듯 앉아있다. 제법 값이 나가는 도자기와 가구로 쇼윈도를 장식한 이 곳은 세월에 닳고 닳은 골동품을 취급하는 ‘이스턴 드림즈’. 그 앞에 앉아있는 노인의 속사정을 끝내 알 수 없지만 가게의 이름이 엇갈린 운명 처럼 다가온 그날의 분위기가 기억 속에서 쉽게 떠나질 않는다.
뉴욕의 쇼핑 중심지인 맨해튼 5번가. 미국의 절기 중 축제의 열기와 환희가 절정에 이르는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앞둔 5번가 상점들의 쇼윈도는 화려한 모습으로 세상의 이목을 끈다. 그러나 절기의 참된 의미는 화려함에 묻혀 사실상 5번가를 떠난 지 오래다. 이곳을 점령한 폭탄세일과 충동구매의 궁합이 주는 짜릿함이 그 빈자리를 대신 메울 뿐이다.
NEED A MIRACLE 기적이 필요해요!
고개를 묻은 한 여성이 초겨울 5번가의 서늘한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있다. 해를 넘기기 전 이맘 때면 어김없이 내 머리 속을 스치는 장면이다. 그녀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기적은 무엇일까. 그녀에게 기적을 도울 것 같은 천사들마저 상점 쇼윈도에 갇혀 누군가를 위해 차려진지 모르는 식탁을 장식하고 있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5번가는 점점 비열한 거리로 변하고 있다. 물질주의에 물든 헛된 세상의 풍경 속에서 기적은 현실에 주저앉은 한 여성의 외침에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소리 없는 그녀의 외침이 의미를 잊은 채 맞이하는 이 절기에 우리의 마음 속 5번가를 장식할 기적의 메세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촬영장소: 뉴욕. 미국의 최대 상업도시인 반면 현재 시가 직면한 빈곤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통계에 따르면 뉴욕에서 매일 4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거리, 전철역 또는 공공시설에서 자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나머지 6만 3천명 이상의 노숙자들의 거취는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문제는 뉴욕의 치솟는 월세 거주 비용과 저임금 근로 기준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작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현재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으며, www.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