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은 지도 만 1년이 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환자와 함께 사투를 벌인 건 현장의 의료진들이었다. 코로나가 초기 심각한 확산세를 보였을 당시 대구 병원에서 의료진들의 일상을 담은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극한의 스트레스 가운데에서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모습에 존경을 넘어 경외심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많은 직업과 일이 있지만 의료진들의 삶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말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함께 살아갑니다 지금 이 곳에서’라는 책은 네팔, 에티오피아, 라오스 등 먼 타지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떠난 글로벌 협력의사들의 생명을 살리는 삶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이다.
글로벌협력의사들이 파견된 대부분의 현장에서는 의료인력들의 절대 수, 지식과 시스템의 부족 뿐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에서 빚어지는 비효율과도 싸워야 한다. 좋은 장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할 방법을 모르거나 인프라가 갖추어지지 않아 방치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복잡한 행정처리 때문에 작은 시도조차 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협력의사들이 해내야 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 전수가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이 정착하기까지 현지 의료진들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파견 초기, 신생아 중환자실의 장비가 부족해 창고를 찾았다. “창고에 있는 것들은 수리되지 않아서 쓸 수 없을 것”이란 말을 들은 터라 별 기대없이 창고 문을 열었다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창고에는 여러 의료장비가 먼지를 수북이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창고에 있는 보물들을 열심히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먼지를 털고 사용설명서를 번역했다.
나는 우연히 내과 병동 창고에서 먼지가 쌓인 채 방치돼 있던 인공호흡기 3대를 발견했다. 신생아중환자실 창고에 있던 인공호흡기와는 다른 기종으로, 산소 가스만으로도 작동되는 인공호흡기였다. 압축공기 때문에 겪은 그간 마음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멋진 인공호흡기가 준비됐지만, 정작 의사들은 새로운 기기에 대한 낯섦 탓인지, 사용법을 모르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인지 기계에 잘 다가서지 않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간호사들은 새로운 인공호흡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 볼리비아, 소아청소년과 곽병곤 >
협력의사들이 타국에서 진료 활동을 하다보면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특수한 경우를 마주하게 된다. 열악한 의료시스템 때문에 1차 진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상태가 급속도로 안좋아 지기도 하고 해당 지역의 독특한 질병으로 진단조차 어려운 일이 생긴다. 한국에서 누구보다 인정받는 의사이지만 환자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현지의 의사들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 닥터 라주라는 외과의가 새로 왔다. 그는 나보다 연장자였는데, 처음에는 내게 잡다한 일을 시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내가 환자에게 처방한 오더를 마음대로 바꾸기 까지 했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의료 교육을 받은 나를 신출내기로 취급하니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
해외 의료봉사를 마음 먹을 때 현지에서 생기는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겠다고 각오한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일로 화를 내고, 내 얘기만을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가 내게 한 환자를 보여주었다.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아이의 머리는 두피가 부풀어 딱딱해져 있고, 군데군데 구멍이 조금씩 나 있었다. 닥터 라주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닥터 김, 이 환자는 어떻게 치료하는 지 알아요?”
처음 보는 케이스라 나는 치료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두피를 열고 수술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닥터 라주는 “이 환자는 여기 구멍에 기름을 부어주면 돼요. 그러면 구더기가 알아서 나와요”라며 웃음지었다.
나는 깜짝 놀랬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두피에 난 구멍에 기름을 부었더니 얼마 뒤 구더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이 일을 겪으며 나는 ‘잘 사는 한국에서 못 사는 네팔로 선진 의료 지식을 전수하러 왔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게 되었다. 닥터 라주는 네팔 사람들의 질병에 대해서만은 확실히 나보다 훨씬 나은 의사였다. <네팔, 외과 김병철>
책에서 소개된 협력의사들은 처음에는 본인들이 현지의 의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지인들 곁에 있어주고 그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대단한 성과와 업적을 이뤄야 할 것 같은 부담에서 벗어났을 때 오히려 의료인으로서 참된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의사로 왔는데 진료를 보지 못하면서, 마음이 답답하고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됐다. 그것은 바로 관계성을 맺고 있던 병원들 사이에서 코디네이터(coordinator)나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내게 성경의 마가복음 10장 45절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 분은 내게 이 말씀을 전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섬김 자체가 위대하다는 것. 이는 나에게 참 놀라운 방향 전환을 제시했다. 나는 지금껏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려 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캄보디아에서 내가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다. <캄보디아, 내과 서정호>
한 사람의 인생은 함께 하는 사람들로 인해 결정된다. 작게는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지역사회와 국가 안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영향력을 주고 받는다. 글로벌 협력의사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영역을 넘어 전 세계로 나아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은 얼마나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내가 하는 선한 행동에 혹여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바라거나 스스로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이 있었는지 말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이분들의 삶을 통해 나는 과연 섬기는 자인가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은 비록 부족하고 막연하지만 조금씩 나와 내 주변을 넘어 다른 이에게 손 내밀며 나아갈 때 더욱 풍성한 삶으로 성숙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글 임효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