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은행에서 근무하다, YWCA에서 진정한 영혼의 주인을 만나 현재는 탈북청소년을 대상으로 기독대안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시는 임향자 교장선생님을 만나 그녀의 삶에 드러난 비앤알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Q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교장선생님의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일단 감리교 목사이구요 남편과 두아들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더라구요. 목사가 되기 전에 외환은행에 근무했었고 서울 YWCA 에서도 일했어요.
Q ’하늘꿈학교’가 1호로 새워진 새터민 기독대안학교로 들었어요. 어떤 사업을 주로 진행하고 계신가요?
하늘꿈학교는 최초의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인데요. 2015년에는 경기도교육청 학력인가도 받았어요. 중학교 1학년부터 고3까지 7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Q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계세요. 귀하지만 또한 힘든 일일텐데, 선생님의 어린시절과 가정환경이 궁금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이북분들이세요.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이라 제가 5대째 기독교인입니다. 이북에서 남한으로 와서는 자식들에게는 오로지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제가 딸만 있는 집의 맏딸이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기대할 것들을 저에게 다 기대하셨죠.
어렸을 때부터 전 과외를 받았어요. 엄마의 감시와 중압감에 등 떠밀려 공부를 했죠.
Q 명문대학을 졸업하시고 외환은행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는데 언제 하나님을 만나시게 되셨나요?
그 당시 외환은행은 꽤 좋은 직장이었어요. 외환은행 명동지점 외환계에 있었는데 은행은 뭐든지 정확해야 하는데 저랑 그 일이 맞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당시 은행은 시험 봐서 들어갈 수 있는 여성이 다니기 좋은 직장이었어요.
은행이라는 곳은 국가간 거래에서도 수입과 지출이 딱 맞아야 하는데 매일 그 것을 추적하고, 맞추고, 입금 요청 메일을 보내고, 한국은행에서 감사받고 하는 것이 제 적성에는 맞지 않아서 2년 후에 퇴사했죠.
저도 기독교 배경에서 살았었지만 제 안에 많은 질문이 있었어요. ‘나는 왜 살지?’,’ 나는 누구지?’,’ 나의 주체는 늘 왜 엄마일까?’ 라는 실존적인 내면의 질문들이 있었지만 답은 없더라구요.
전도는 사실 은행 다니던 시절에 받았어요. 다른 부서에 있던 직원이 손님에게 성경책을 꺼내 놓고 전도를 하는 거에요. 그때 당시 제 가치 기준은 학벌 위주였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어요. 그래서 그 분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보고 전도를 하냐고 물어보면서 어느 학교를 나왔냐고 했더니 경복고등학교와 서강대를 나왔다는 거에요.
집안 배경도 좋고 학벌이 나쁘지도 않은데 왜 저렇게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할까 생각하는데, 그 분이 저보고 예수님을 만나봤냐고 묻는 거에요.
‘예수님을 만나는 게 무슨 말이지?’ 제가 궁금해 하니까 자기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데 안 믿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거에요. 그때는 그 말이 와 닿지도 않았지만 제 내적 갈등이 너무 심하니까 그분을 따라 매주 교회 저녁예배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엄마한테 혼날 줄 알면서도 밤새 기도했어요. 기도할 줄도 모르면서요. 하나님이 계시다니까 열심히 기도하면 나한테도 보이겠지 하면서 말이예요.
Q 은행에 다니는 것은 남들이 보기엔 안정적인 길이었는데 목회자로 선생님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던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YWCA 가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어요. 그 당시 서울 YWCA 는 한국의 뛰어난 기독교인들이 다 모이던 곳이었어요. 거기서 많은 도전을 받았었어요.
그러던 중에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때는 제가 이미 결혼을 했었고 군의관으로 남편이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아이도 둘이나 있었구요. 그런 상황에 주의 종이라는 말을 들으니 집도 버리고 애도 버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군의관 남편을 따라 삼척과 광주에서 지내야 할 때,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가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남편의 군대를 따라갔죠. 저에게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달라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다 제 마음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느끼게 되고 신학대학을 가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은 평탄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공부하다가 건강도 나빠지고,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며 목회의 길을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하나님이 제가 기도하는 것은 모두 들어 주셨어요.
한번은 기도를 하고 싶어서 기도원에 갔다가 집에 가야하는데 갈 방법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 저 집에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차도 안 다니는 산속 기도원 앞에 택시가 지나가다가 돌아오더니 내 앞에 딱 서는 거에요. 산소에 갔다오느라 쉬는 개인택시였어요. 서초동 집으로 가야 하는데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버스터미널 까지만 태워달라고 했는데, 기사님 부인이 집까지 태워주라고 하셔서 집에 편하게 왔죠. 제 주변 환경이 좋아진 건 아니지만 환경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확신을 주는 사건들이 많이 있었던 때예요.
Q 그리고 해외선교를 하시게 되었는데, 어떻게 처음에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저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어요. 남들이 안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간 곳이 해외선교센터였어요. 그때만해도 해외선교라는 것이 처음 생기던 때여서 해외선교란 무엇인가 혼자 공부했어요. 오엠에프(OMF International,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오엠국제선교회(Operation Mobilization), 방글라데시 개발협회같은 해외선교단체들을 두루 다니면서 배웠어요.
선교사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어떻게 선교지를 개발할 것인가를 연구했어요. 그러다 종족 개념의 선교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했어요. 이슬람이나 회족 족장들이 하나님에 대한 꿈을 꾸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일어나면서 선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Q 북한 선교로 방향을 전환 하셨어요. 북한을 마음에 두신 이유가 있을까요?
96년에 다시 시작하는 의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했는데 중국에 계시는 선교사님을 통해 북한의 탈북자들이 넘쳐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분이 중국으로 불러서 갔더니 탈북민들의 실상이 너무 비참했어요. 어른은 변화가 힘들고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겠다고 생각해서 세 분의 선교사와 목사님을 서포트하면서 한국에 하나원을 열었어요. 예배, 1박2일 홈스테이, 청소년교육, 여성교육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청소년 교육을 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Q 이 학교가 세워지기 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역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목사님 한 분이 갑자기 같이 하자고 해서 같이 고민하던 중에 그 분이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 분이 장소와 후원금을 다 준비해 주고 3월에 개교를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1월에 돌아가시고 저도 그 와중에 뇌종양판정을 받았어요. 학교를 세우는 것을 접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다가 종양의 사이즈가 조금 줄었고 하나님이 치료하신다는 확신을 얻어서 무작정 2003년에 시작했어요.
Q 학교를 세워나가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선교하면서 배운 것은 처음에는 부모나 친구처럼 도와주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할 수 있게 그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예요. 대한민국의 교회도 그렇게 성장한 거잖아요.
탈북 아이들이 1세대이기 때문에 힘들어요. 아무리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해도 신학을 하기 어려워요. 북한 교사 출신도 400명이상 넘어왔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실력이 많이 부족해요.
북한은 많이 부족해요 지식, 건강, 인간관계, 영성 등 여러가지 부분에서요. 예수님에 대해 들어봤던 아이가 한 명도 없었어요. 요즘에 온 아이들 중에는 성경은 ‘미신책’이라고 들었다 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는 정도예요. 한 아이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예수님을 믿고 수용소에 잡혀갔는데 아버지가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 조차도 여기 와서 알았어요. 북한은 우리 어머니 세대 노인들 정도만 교회를 기억하고 있고 그나마 신앙이 있어도 자식도 부모도 부부 사이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해요. 1974년에 김일성이 종교말살 정책을 하면서 부터는 종교가 완전히 없어졌죠.
그래서 전 지금 이 아이들을 기대합니다. 500명의 아이들이 이 학교를 거쳐갔지만 3분의2 정도 졸업을 했고 제대로 정착한 아이가 100명 정도인데 대학을 졸업했거나 재학중이에요.
그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아이들은 20%정도, 여자 아이들은 70% 정도예요.
Q 탈북 청소년을 섬기는 일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학생이 있다면요?
사모가 된 83년생 여학생인데 12살에 혼자 탈북해서 중국에서 살아온 아이에요. 15살에 러시아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다가 중국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한국에 오게 된 아이였어요.
학교 시작한 초반이었기 때문에 외국의 유명한 의과 교수, 타임지 기자, 변호사 같은 분들을 모셔다 강의를 들었었는데 그 당시 강의를 왔던 의대 교수의 강의를 듣고 의사가 될 꿈을 안고 탈모가 올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악착같이 공부하고 기도하고 했지만 의대는 무리일 것 같아서 관련 있는 숙대 생명공학과를 들어갔어요. 하지만 따라가기 힘들어했어요.
북한은 일반아이들은 공부할 필요도 없고 교사는 월급이 없어서 촌지를 받아 생활 하기 때문에 교육내용도 부실해요. 그래서 특별한 아이들만 공부를 하죠. 생명공학과 갔던 그 아이는 결국은 공부를 따라 가지 못해요. 고민하다가 전공을 바꿔 조리학과에 들어갔어요.
졸업하고 결혼해서 목사님 사모님이 되어 남편을 열심히 도와요. 방송통신대학에서 사회복지도 공부하고 지금은 일자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Q 아이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가정형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정확히 어떤 생활이고 그걸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교를 거쳐간 500명 넘는 아이들과 가정형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24시간 삶을 공유했다는 것은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전원이 다 기숙사 생활을 할 수는 없어요. 같이 살수 있는 선생님을 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이 아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가정의 깨어짐이에요. 태어나면서부터 김일성 삼부자의 사진을 보고 자라면서 남의 눈치를 보고 솔직하지 못하고 나에게 유익이 되면 약속은 언제든지 깨도 된다는 것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생활이 변화되기가 너무 힘들어요. 온전한 가정이 있는 아이들은 500명중에 10명도 안되고 북한에서부터 깨어진 가정이 많아요. 아이들의 온전한 변화를 위해서 가정형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요. 한집에 4-5명의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며 가정에서 배워야 할 것들과 안정감 등을 느끼는 거에요.
이걸 한 이유는 저는 학교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리스찬 리더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는 선생님들도 상담, 교사, 엄마의 역할을 다 감당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한 구조의 학교에요. 그래도 이번에 처음으로 졸업생 대상으로 리더십 비전캠프를 했어요.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로 한국교회를 전도 했던 것처럼 북한을 변화시킬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Q 최근 남북관계가 계속 이슈가 되고 있는데 크리스천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북한의 실상을 탈북민을 통해 미리 보여주신 거에요 한국교회는 이미 복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마태복음 산상수훈처럼 마음을 비우고 애통해 하고 진리의 허리띠를 메고 기꺼이 고난 받는 자로 나와야 합니다. 달리는 자가 복 있는 거에요. 한국교회가 그렇게 성장했잖아요. 우리 세대는 열심히 앞을 향해서 달려왔어요. 지금은 등 따뜻하고 배부르니까 이데올로기나 하나님보다는 논리적인 것들을 따라가고 있어요.
성경은 진리이고, 진리의 허리띠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어떻게 동여매느냐 하는 것을 교회가 감당해야 하나님의 도구가 돼요. 선교 한국이 되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분명해져야 해요. 그래야 북한이 열리고 북한이 열리면 땅끝까지 가요.
한국교회가 준비된다는 것은 다시 주의 낯을 구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북한이 제일의 기독교 핍박 국가인 것을 남한은 남의 일로 보면 안됩니다. 탈북자들의 삶의 형태들을 보면서 북한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요. 각성하고 나눠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생의 마지막 말씀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에요. 한국교회가 건물을 짓는 것은 그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의 마음이지만 제 마음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있어요. 우리가 처음의 애통한 마음을 회복하면 하나님이 재정, 사랑을 계속 부어 주실 거에요.
Q 앞으로 ‘하늘꿈학교’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비전이 궁금합니다.
나이가 들다보니 별다른 욕구가 없어요. 요즘을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어쨌든 끝은 있잖아요.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해요.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알고 참 진리를 위해 살아내는게 힘들지만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죽음조차도 축복일 수 있는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게 복된 일이죠.
30년을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돌아보니 형편없는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살리신 것을 보며 통로라는 것을 느껴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지나고 보니까 고백할 수 있어요. 내 상황이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이 옆에 계신지, 앞에 계신지, 뒤에 계신지도 모르고 ‘아이들의 필요가 무엇일까’,’ 이 결핍을 어떻게 채울까’ 라는 것만 생각을 하고 왔는데 그게 주의 길을 예비 하는 길이 되어온 거에요. 은혜입니다.
학교를 늘리거나 이름을 알릴 생각은 없고 그저 좋은 아이들이 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 아이들이 예수 믿고 이 사회에 건강하게 잘 정착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그게 그 아이들이 리더가 되는 첫 걸음이거든요. 자기 힘으로, 자기 돈으로 자립해서 그 과정 속에서 시장경제를 배우고 성실함과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는 거죠.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리는 일이에요. 그 일을 위해 달려가는 거죠.
글. 김정아,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