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하다 에티오피아 선교사가 된 김태훈 선교사와 그의 아내 김희연 선교사를 B&R 매거진 팀이 만나 그들의 사역과 삶에 나타난 B&R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비앤알 독자분들께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태훈) 안녕하세요. 외과의사로 일했고, 정부사업으로 에티오피아에서 보건의료 사업 총괄을 하다가 지금은 새 일을 계획 중인 김태훈 선교사 입니다.
(희연) 안녕하세요. 저는 김태훈의 아내 김희연 선교사이고 에티오피아의 빙햄 아카데미(Bingham Academy)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 선교사가 되다
김태훈 선교사님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과 아산병원에서 일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해외 의료선교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태훈) 제가 대학생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어요. 우리사회는 경쟁사회라 다른 사람을 이겨야 올라가는 삶인데,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삶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것 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예배팀 리더로 예배를 준비하는데 하나님이 ‘네가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어요. 어떻게 그런 대답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갈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시간이 흘러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군복무 대체로 방글라데시에서 3년을 보낸 후, 서울대병원에서 2년 근무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일하던 중에 선교사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기대도 컸어요. 젊은 의사로 한국에서의 역할도 적지 않으니 교수가 된 후에 커리어를 더 쌓고 선교사로 나가라고 주변에서 말했어요. 하지만 전 한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삶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교수가 되고 5년, 10년이 지난 후에는 선교를 하러 나갈 영성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사직했어요.
(희연) 다들 자리를 잡은 후에 큰일을 하라고 하셨지만, 남편은 나이가 들어서 남은 인생을 헌신하는 것보다는 자기 인생 중에 제일 좋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했고 저도 동의했어요.
두 분은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어요?
(희연) 저희는 온누리교회 대학부의 선후배 사이었어요. 서로 얼굴만 아는 정도였는데 10년만에 교수님 소개로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 제가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여서 먼저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이름이 익숙해서 물어보니 제가 알던 그 선배였어요. 한국에 들어오면 한번 밥이나 같이 먹자 하고 10년 만에 만났어요.
만나서는 본인은 선교를 나갈 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돈많이 벌고 명예를 중시하는 의사의 아내가 될 생각이면 시작도 하지 말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 교제를 시작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기도를 하기로 결정했어요. 새벽기도 중에 하나님이 제가 대학교 1학년때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했던 것을 기억나게 하셨어요. 그 후로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렇게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떠난 선교지 남수단에서 에티오피아까지
처음 선교지는 어느 나라였는지, 그리고 거기서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요?
(태훈) 처음엔 남수단에서 정부 보건 사업을 진행했어요. 남수단은 정말 열악한 곳이에요. 그때 저희 가족은 에티오피아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저는 남수단을 왕래하며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8개월 후에 내전이 터져서 정부 보건 사업이 중단 되었어요.
저희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아내가 에티오피아의 한 학교에서 일을 하게 되어서 비자가 해결되었고 계속 에티오피아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어요.
*남수단은 아프리카 동북부에 위치한 나라. 수단의 일부였으나 오랜 내전 후에 2011년 남수단으로 독립했다.
에티오피아는 어떤 나라인지, 그 곳에서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태훈)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로 그 자긍심이 대단해요. 그리고 다른 문화에 대해 폐쇄적이라 맥도날드나 스타벅스가 들어오지 못한 나라이기도 해요.
지난 5년 동안 저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이라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에서 일했어요. 세계 10 여국에서 보건 의료사업을 하고 있는 곳으로 아프리카에는 제가 처음으로 파견을 받았어요. 남수단에서 처음 정부사업을 시작했고, 에티오피아에서 두번째 사업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아프리카 4~5개 나라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저희가 하는 일은 의료 시스템을 강화하는 사업이에요. ‘보건의료 역량강화’를 위한 사업이라고 이해하면 쉬워요. 예전에는 약만 갖다주거나 인력 트레이닝만 시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한가지 만으론 성과를 보기 힘들어요.
에티오피아는 중앙집권적이고 통제가 심한 나라여서 의료시스템을 강화하는 사업으로는 NGO보다 국가기관에 속해서 일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어요. 드러나게 복음사역이나 전도를 하기는 어려웠지만 자기의 일을 하면서 선교사의 정체성을 가진 ‘다니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김희연 선교사님은 어떤 사역을 하셨어요? 선교지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희연) 저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어요. 에티오피아에는 막내가 세 살 때 왔어요. 전기나 물이 끊기는 일이 다반사라 힘들고 짜증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풍족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작은 일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어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도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주는 곳이라서 그런지 온 지 1년만에 우리 첫째의 성격이 많이 밝아졌어요.
“엄마, 한국에 있을 때는 내가 뭘 잘하면 친구들이 시기, 질투하고, 뭘 못하면 왕따시켰는데 선생님이 아무 말도 안했어요. 그런데 여기는 선생님이 날 사랑하는 걸 알겠어.”
여기 오시는 선생님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 주세요.
(태훈)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저보고 거기서 어떻게 아이들 학교를 보내냐고 걱정하는데 저희는 오히려 아이들을 한국에서 어떻게 학교를 보내니? 라고 물어봐요.(웃음) 전 오히려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더 걱정되요. 저희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밝고 겸손을 배울 수 있는 환경에서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 좋아요.
에티오피아 의료사역의 어려운 점은…
소외된 지역에서 선교사로서 일하면서 힘든 점이 있다면요?
(태훈) 첫째로, 에티오피아는 계속해서 현지 의사를 양성 시키고 의료 시스템을 지속, 발전하게 해주어야 하는 곳이라 현지 의료체계를 잘 이해하고 다른 선교단체들과 협력하는 점이 중요한데 방향성이 다를 때 힘들어요.
병원사역의 경우 각 나라마다 의료체계가 달라요. 외국인들이 들어와 선교병원을 한다던지 이동진료를 하는 경우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죠. 자국의 의사들과 병원이 있는데 선교병원을 운영하면 진료비가 공짜인걸 아니까 자국민들이 선교 병원을 먼저 찾게 되거든요.
현지 의사와 병원 입장에선 기회를 박탈당하고. 돈도 못 벌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지니까요. 나중에 외국인들이 돌아가도 환자들은 기다리면 좋은 의사들이 와서 진료도 무료로 해주는 걸 아니까 현지 병원을 가지 앉고 앉아서 병을 키우는 악순환이 되는 거예요.
옛날에 한국에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병원을 열었을 때는 한국엔 서양의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에티오피아의 경우 의과대학이 이미 30개가 있기 때문에 단기 의료선교팀이 와서 진료와 약을 무료로 해주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거죠.
두번째는 현지 의사 트레이닝에 많은 노력을 하는데, 이렇게 훈련받은 의사들이 다른 선교병원에 가는 경우 힘들때가 있어요. 제가 에티오피아 현지 의과 대학의 의사들을 트레이닝 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한국에서 트레이닝을 받게 했는데,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한국에서 들어온 선교 병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갔어요.
현지 의사들이 선교병원에 가는 이유는 선교 마인드가 있어서라기보다 정부 현지 병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기 때문이에요. 저는 현지 의과대학의 역량 강화를 위해 트레이닝을 시켜주었는데, 이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때 마음이 힘들어요.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한번에 많은 사람을 고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12 제자를 양육하는데 집중하셨어요. 선교도 마찬가지에요. 더디고 바보스럽더라도 현지의 사람들을 세우는데 집중해야 해요.
사실 현지인과 일하는 것이 더 속 터질 때가 많아요. 내가 하면 더 빨리, 더 많이, 더 잘할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을 하게 하려니까 옆에서 잔소리하고, 혼내다가는 다시 달래가며 해야 하니까요.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 풍성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해야 해요.
병원사역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사람이 있을까요?
(태훈) 에티오피아는 1억명이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고 땅은 남한의 13배가 넘어요. 하지만 선천성 심장병 수술을 하는 병원은 한 곳도 없어요. 선천성 심장병으로 태어나면 죽거나, 부자집에서 태어난 경우 외국에 가서 수술을 해요.
2013년 처음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 보건부 차관이 에티오피아에는 심장병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으니 한국에서 도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심장병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심장병 환자 몇 명을 데려가서 수술을 해주는게 아니라 심장병 수술 팀을 구축하는 일을 시작한 거죠.
한국에서 20명의 중환자실 간호사, 수술실 간호사, 외과의사, 소아과의사, 마취과 의사, 심폐기사로 구성된 전체 팀이 와서 자기 분야에 속한 현지인을 일대일로 붙들고 일주일간 같이 일을 했어요. 그 분들이 에티오피아로 와서 수술을 하고, 현지 의사들을 한국 연수 프로그램에 보내서 수술하고 이런 과정을 반복한지 3년이 되었는데, 사실은 5년이 목표인 프로젝트예요. 그 결과 이제는 에티오피아 수술팀만으로 하는 자체 심장병 수술을 앞두고 있어요.
현지인 의사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심장병 수술을 하는 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서 혼자서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인도와 러시아에 가서 연수를 받고 왔지만 심장병 수술을 집도하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대요. 그런데 한국에서 각 분야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팀을 이뤄서 에티오피아 현지 의사들을 일대일로 지도해주는 것이 하늘의 도움인 것 같다고 너무 감격스러워 하더라구요.
이 친구가 한국에 가서 두 달간 서울대병원에서 연수를 했는데 중환자실에서 밤 11시가 넘도록 환자를 보고 일요일에도 아침부터 환자를 보고, 공부하더라구요. 보통 한국에 오는 외국인 의사들은 소풍도 가고 일도 쉬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친구는 밤 늦게까지 환자를 보고 공부한다고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어요. 저는 이 친구가 외국으로 연수도 갔다왔길래 재정적으로 여유있는 사람인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언제 집에 초대되어 가보니 정말 가난하게 살고 있더라구요.
본인의 어려운 재정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분은 한국에서 의료팀이 오면 에티오피아의 소아 심장병 환자들을 수술해줄 의사분들이 오신다며 새벽에도 공항으로 꽃다발을 들고 나와요. 한국 의사 선생님들이 말씀하시길, 에티오피아는 의료 절차도 까다롭고 힘든 환경이라 심장병 프로젝트가 안되는 이유가 백가지이지만 이 친구 하나 때문에라도 여기에 온다고 하실 정도로 정성이었어요.
저희가 하는 사역의 의미가 현지 의사들이 마음으로 원했던 사람들이 만나고 또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서 꿈을 실현하는거예요. 이제는 현지 의사와 병원이 스스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 자체적으로 수술을 몇 건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에티오피아 아이들이 한국 대학병원에서 수술하고, 수술 사진을 에티오피아로 찍어 보내면 관리도 편하고 좋아요. 그런데 편한 길을 놔두고 한국에서 모든 팀이 다와서 자기들을 붙잡고 평생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을 일대일로 붙들고 가르쳐 주는 것에 감동을 받아 4일을 밤을 새고 배우던 의사도 있었죠.
에티오피아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시나요?
(희연) 남편은 정부에서 파견 받아 들어갔기 때문에 무슬림들과 거부감 없이 관계를 쌓기 쉬웠어요. 오히려 사람들이 “당신은 한국에서 잘 살 수 있는데 왜 여길 왔나요?”라고 먼저 물어봐요. 그 쪽에서 그렇게 물어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크리스챤임을 얘기하면서 영적인 대화의 물고를 틀 수 있어요. 에티오피아에선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지만 무슬림들이 마음을 열고 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어요.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김태훈 선교사
김태훈 선교사님은 최근에 ‘파킨슨 병’을 진단받으셨다고 들었어요. 마음이 많이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없으셨는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태훈) 남수단에서 사역할 때, 말라리아에 심하게 걸렸어요. 병이 낫고 회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그 이후로 몸이 약간씩 불편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냥 몸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는데 그때는 몸이 덜 회복되어서 그런 줄 알았죠. 몸이 불편해지니까 자연스럽게 걷지 못해서 걸음 걸이도 바뀌고 발등이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어요. 통증이 심해져서 1-2주 정도 치료를 할 계획으로 한국에 왔는데 병원에서 자세랑 동작이 이상하다며 몇가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는 파킨슨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죠.
에티오피아에 간지 1년 3개월만이었어요. 이제 겨우 자리잡고 일이 시작되고 있는 시기였는데 당황스러웠어요. 이 병은 치료제도 없고 원인도 모르고 진행 속도도 사람마다 달라 예측할 수도 없어 하늘만 보게 되는 병인데 말이죠. 부모님들도 아예 한국으로 들어와서 병관리를 하라고 하셨죠. 저희도 그래야 하나 싶어서 아내와 저는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아침에 산책을 갔는데 소나기가 쏟아지는 거에요. 수풀처럼 나무가 우거져 있는 곳이 있어서 잘됐다 생각하고 비를 피하려고 들어가 있는데 하나님이 ‘비가 쏟아진다고 집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감동을 받았어요. 그때 생각했죠.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구나. 나에게 피할 길을 내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부모님은 한국으로 오라고 하셨을 거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에서 사역을 계속하시기로 결심하신 이유는 뭘까요?
(태훈) 50일만에 에티오피아에 돌아왔는데 공항에 내린 순간 너무 평안하고 감사했어요. 그래서 당분간은 하나님이 여기 있기를 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다른곳으로 가라는 확신이 없으면 고민 없이 여기 있어야 겠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실 저희 어머니와 함께 외래진료를 갔었는데 어머님이 의사에게 “애 돌아와야 하죠?’하고 물었는데 의사는 나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거기나 여기나 똑같아요. 이 병은 약먹는 것 밖에 없어요”라고요.(웃음)
(희연)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어요. 에티오피아에 갈 때 양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한국에 있는 모든 걸 정리하고 나간 거였 거든요. 이제 겨우 여기에 적응했는데 진단을 받고는 원망스러운 마음보다는 혼란스럽고 두려웠어요.
하지만 남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이 있었고, 저 또한 이 길이 저 혼자가는 길이 아니라 그 분과 함께 하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제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아기처럼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데 예수님이 어디론가 걸어가시는 장면을 보았어요. 예수님 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저는 행복하게 안겨서 가는 장면이었어요. 그 날부터 너무 평안해졌어요. 병을 기뻐할 수는 없지만 모든 상황에 감사하다는 남편의 말에 공감했죠.
앞으로의 계획과 내 인생의 B&R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태훈) 에티오피아에서 한국 보건의료사업 총괄하던 일은 마무리를 했고, 앞으로 에티오피아 보건부에서 어드바이저로 일할 예정이에요. 예전에는 외부인이었지만 이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서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월급은 반의 반도 안되게 줄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 깊이 경험할 수 밖에 없게 되었죠.
처음 한국에서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나올 때 염려하셨던 분들이 있었고 저도 마음이 편하지 많은 않았지만 에티오피아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해오면서, 걱정보다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기대가 더 커요. 잠시동안은 재정과 환경 때문에 어려울 수 있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제 B&R 매거진의 공식질문을 해볼까요? 내 인생의 B&R은 무엇일까요?
(희연) 가장 큰 블레싱은 에티오피아에서의 삶이에요. 이 곳에 살면서 겪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게 되었어요. 여러가지 물리적인 어려움들이 당연히 있지만 이제 크게 신경쓰지 않는 상태가 되었어요. 오히려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하게 되요 아이들이 밝게 자라주는 것도 감사하고 그 곳에 불러주신 것 자체가 감사해요. 한국에 있을 때는 깊이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매일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에티오피아에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어요. 기도하고 신뢰하며 기다리는 시간들이 레스팅이라고 생각해요.
(태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함께 있는 것을 경험하는 거에요. 저도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하지만 시편 기자가 ‘내가 다른 어느 곳에서 천날보다 주님의 궁정에서 하루를 더 사모한다’ 라고 쓴 것 처럼 저도 아주 짧게 맛본 거지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아요.
하나님과 함께 있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 그것이 블레싱이죠. 우리가 집이나 한국을 떠나 먼 곳으로 간다면 그것은 주와 함께 있기 위함인 거죠.
릴렉싱은 ‘너는 내게로 와서 내게 배우면 너에게 쉼을 주겠다.’ 주님 계신 곳에 있으면 수고와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선교 사역을 하겠다고 아둥바둥 난리치면 탈진해서 쓰러지죠.
저희가 떠난지 5년이 지났는 데도 아직도 주변 사람들은 ‘너희 언제 돌아오냐’ 라고 물어봐요. 그럼 전 ‘왜 돌아와야 하냐’ 되물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제일 좋은 곳이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우리가 있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블레싱이자 레스팅 입니다.
지금은 저희가 그곳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세요. 그 곳에 있을때 우리가 행복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 다른 곳이라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죠.
‘나의 멍에를 매고 나에게서 배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멍에라는 것이 예수님이 혼자서도 충분히 끄실 수 있는 멍에를 우리와 같이 지자는 것이거든요. 훨씬 파워풀하고 능숙한신 분이 끄니까 우리는 그냥 걸치고만 있는 거죠. 우리가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엄청나게 고생하는거 아니고, 주님의 짐은 쉽고 가볍다는 것을 알고 함께 가는 것 그게 레스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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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정아, 황인영,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