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한 부족마을. 이곳엔 매일 두 시간 넘는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있다. 이정표 하나 서있지 않은 등하굣길에서 맹수에 쫓겼다는 형, 폭우에 휩쓸렸다는 친구,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끌려갔다는 여동생 등 이들 사이에선 날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천만한 이야기들이 넘친다. 가혹한 등하굣길처럼 들리지만,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배움을 택한 아이들은 이 여정을 기꺼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경상림>, <화양연화>, <일대종사> 등 홍콩을 배경으로 노스탤직(Nostalgic) 감성을 자극하는 미장센을 선보여 세계 영화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왕자웨이(王家卫)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렇게 전한다. 영화관에 누구와 함께 어느 길로 갔는지,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먹고 마시면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영화를 보고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의 여정이 모두 영화의 일부라고. 왕 감독은 이것이 영화를 보는 재미라고 말한다.
요즘엔 극장을 가지 않고서도 집에서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면서 왕자웨이 감독이 말하는 그 ‘여정’의 의미는 많은 부분 생략된 것 같다. 게다가 코로나19의 여파로 극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더 줄고 있다고 하니 자라나는 아이들은 훗날 이 ‘여정’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의 사진에세이에 영화에 대한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외출과 모임이 자유롭지 않은 펜데믹 시기에 영화로 세상을 만나고 있다는 현실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거리두기’로 인해 일상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올해는 대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라며 무력감이나 우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갈수록 비대면이란 삶의 방식이 일상에 뿌리를 내리면서 만남이 뜸해지다 보니 아마도 인생의 밀도가 예전처럼 단단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2021년이 내게 한 편의 영화라면 왕 감독이 말한 ‘여정’이라는 것이 결핍된 미완의 작품으로 기억되진 않을까. 하지만 이런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몫이 다 사라진건 아닐테다. ‘한 줄 평의 귀재’로 유명한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한 방송에서 ‘재미없는 영화는 어떻게 참고 보나?’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명징하게 해답을 내놓지 않았던가. ‘씹는 재미’도 있다고.
한술 더 떠 해외의 한 평론가는 왕자웨이 감독의 <화양연화>에 대해 “스토리 없는 영화에 내가 그렇게 감동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라고 쓰지 않았던가. 때론 삶에 감흥이 부족하거나 이야기가 시들더라도 이 위태로운 시기를 버티려 애쓰는 우리들의 저항이 어쩌면 2021년이라는 해가 품은 숨은 매력일지도 모른다. 상상으로만 볼 수 있는 영화 <2021>을 향해 나만의 한 줄 평을 남겨보자.
촬영장소: 케냐.
수도인 나이로비를 벗어나면 대게 그렇듯 중앙정부의 관심이 닿지 않는 지역의 어린이들은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숙제를 마치고 귀가한다. 2시간 이상을 걸어 어둑해진 저녁 무렵 도착한 집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으며, 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