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나라 최고령 현역 여의사의 별세 소식이 언론에 회자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서 의사가 되었고 고령에도 불구하고 은퇴하지 않고 요양병원에서 끝까지 환자를 돌본 이야기 어느 것 하나 평범치 않은 한 여의사의 숨겨진 보석 같은 이야기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한다.
9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의사 故 한원주 원장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로 의료 봉사를 통해 섬김의 삶을 살았던 신앙인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한 원장은 고려대 전신인 경성의학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산부인과 전문의를 취득한다. 이후 결혼해 물리학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내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다. 이후에 자녀 양육문제로 인해 귀국해 개업의로서 안정적인 삶을 꾸려 나가게 된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그녀의 삶에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사랑하는 남편이 뜻하지 않게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 때 정말 하나님께 기도밖에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전에는 나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여지고 경험되는 순간이었다고 말이다.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그녀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되었다.
“네가 뭘 그렇게 울고불고 하느냐. 넌 누구보다도 부요하게 살아왔다.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았고,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미국 구경도 많이 했고, 병원이 잘 돼서 돈도 많이 벌지 않았느냐. 너는 네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냐?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 차려라.”
그 때 이후로 한원주 원장의 삶은 낮은 곳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 새벽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월 천 만원씩 수입을 냈던 병원을 그만두고, 백 만원 월급을 받는 의료선교의원 원장으로 갔다. 30년 넘게 환자들의 병든 육체를 치료할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삶을 돕는 전인치유에 헌신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삶의 순간까지 환자를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근무했던 남양주 한 요양병원에서의 계약은 건강할 때까지 일하고, 일할 수 없었을 때 돌아와 생을 마감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녀는 의술로는 사람을 고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주말을 제외하고는 병원에서 항상 환자들 곁에 함께 있어 주었다. 함께 노래도 부르고, 운동도 하고, 말씀도 나누며 환자들과 삶을 나누었다.
94세의 인생의 순간들을 올곧게 그리고 빽빽히 사랑과 헌신으로 채워갔던 한원주 과장의 생애를 알아가며 내 마음속에 묵직한 울림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내 삶도 그저 내 계획과 목적에 맞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언젠가 나도 이 세상을 떠날 때 사랑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후회하기 보다 매 순간 사랑했기에 행복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되어졌으면 좋겠다고 다짐해본다. 최고의 의사는 될 수 없겠지만, 최고의 위로자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많은 돈을 벌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진 손수건으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랑과 위로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내가 산 인생이 헛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처럼, 지금을 온전히 누리며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말이다.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 참고영상: 극동방송 ‘온더로드’ 다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