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로 재직하는 동안 5,600여명의 헤어진 가족을 찾아준 백석대학교 이건수 교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실종 아동을 찾은 사람으로 미국 월드 레코드 아카데미에 공식 등재 되었다. 경찰로 일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입양아들에게, 가족을 찾아주며 평생의 은인이 된 그의 삶의 이야기를 B&R 매거진에서 준비했다.
Q 안녕하세요 이건수 경위님. 아. 이제 경위님이 아니시네요. 3월부터 백석대 교수로 가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올해 3월부터 16년간의 경찰 생활을 내려놓고 백석대학교 경찰학부 전임교수로 학생들을 양성하게 되었습니다.
Q 원래 경찰을 그만두고 교수가 되려는 계획이 있으셨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유독 실종가족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한 명이라도 더 찾아주려고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니 노하우도 생기고 박사학위까지 따게 되었어요. 그간의 경험과 지식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자 교수로서 새출발을 하려고 합니다.
인권변호사를 꿈꾸던 청년, 경찰이 되다
Q 경찰은 어떻게 되신 건가요?
사실 전 원래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서울로 올라와 변호사 준비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경찰시험을 보자 싶어서 응시를 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고, 사람을 돕는 일인 경찰이란 직업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되었어요.
Q 어떻게 헤어진 가족들을 찾는 일을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처음에 제가 경찰이 되고나서는 유치장에서 근무했어요. 유치장은 흉악범들이 많이 모이는 곳인데 제가 그 분들을 따뜻하게 대해줬어요. 진심으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담을 해주다보니 그 분들이 마음을 열고 “이건수 경찰관을 봐서라도 다시는 유치장 안오겠다”라고 하시더라구요. 그 분들에게 필요한건 처벌이 아니라 위로인 경우가 많았어요. 물론 법적으로 처벌은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의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많았어요.
제가 “인간미 있는 경찰”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2002년 2월에 민원실로 보직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민원실에서는 말 그대로 여러가지 민원을 처리하는 곳인데, 그 일 중에 헤어진 가족을 찾는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 일은 업무의 3%도 되지 않는,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이었죠.
그런데 가족찾기 일을 하면서 그분들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져서 제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그러다가 2004년도에 제가 근무하던 남양주 민원실이 가족을 잘 찾아주는 곳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경찰조직과 언론에서도 관심을 받게 되었어요.
그동안 경찰 정보과로 이동하라는 권유가 있었어요. 정말 좋은 보직이고 가면 성장할 수 있는 곳이라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의 눈물이 제 마음과 머리에 계속해서 떠올라 잠도 자기 힘들 정도더라구요. 결국 부서이동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가족찾기에 정진하기로 했어요. 그때의 부서이동 권유가 제 평생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된거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Q 우리나라에 많은 실종가족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경우가 제일 많을까요?
정말 다양한 경우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헤어진 경우도 있고, 60~70년대에는 먹고 사는게 힘들어서 아이를 이곳 저곳에 보내다보니 헤어지게 된 경우도 있어요. 길을 잃어버려 헤매다 시설에 보내지거나 입양을 가게 된 아이들도 있습니다.
또한 라이따이한(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 국군병사와 베트남 여성사이에 태어난 자녀)이나 코피노(필리핀에 체류했던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사이에 태어난 자녀) 아이들도 있고 남북이산가족 아이들까지 정말 다양하죠. 우리나라의 경우 열 가정에 한 가정이 이산가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입양된 아이들만 35만명이 넘습니다. 이 작은 나라에 이렇게 많은 이산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픕니다.
Q헤어졌던 가족들이 상봉할 때는 보통 어떤 분위기인가요?
제가 이제까지 5,600여건의 상봉을 성사시키면서 느낀 분위기와 정적은 제 심장을 아프게 해요. 몇 십년 만에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막상 만나면 만나자마자 막 울고 그럴 거 같죠? 아니예요. 처음엔 그냥 가족간에 침묵이 흘러요. 아이는 삼십여년을 고아로, 부모는 그 세월 동안 아이를 찾느라 제대로 된 삶도 살지 못하다가 상봉했는데도 세월의 간격이 있다보니 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가만히 있어요. 그럴 땐 정말 심장이 찢어지면서 눈물이 나는 느낌이에요. 그러다가 서로 부둥켜 안고 울때는 아프면서도 기쁜 눈물이 나요.
Q 찾아주신 가족 중에 63년 만에 가족 상봉을 한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63년이나 지났는데도 가족들이 서로를 만나고 싶어하나요?
살아있는 한 가족은 포기 못해요. 살아있는 한 가족을 찾는 마음은 평생동안 계속 됩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 뿌리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절대 지울수가 없어요.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일이기 때문이죠. 버림받았다는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현재의 자신을 사랑하도록 최선을 다해 가족찾기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불나방 이건수 경위
Q 종교가 기독교라고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전 정말 가난했어요. 어렸을 때는 어둡고 우울한 사람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먹었는지, 양치질은 어떻게 하고 머리는 뭘로 감았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가난했어요. 중학교 1학년부터 부모님과 떨어져서 부산에서 유학생활을 했어요. 밥도 못먹고 용돈도 못받고, 차비도 없어서 늘 걸어다녔죠. 고등학교때는 옆집에 차비를 빌리러 다니기도 하고 그것도 못할 때는 기념주화를 차비로 낸 적도 있었어요. 대학교에 다닐 때는 매일 똑같은 점퍼를 입고 다녀서 점퍼에서 광채가 날 정도였어요.어렸을 때 부모님과 떨어져서 늘 외로웠어요.
대학교 2학년 때 미팅을 나갔는데 그 자매가 제게 예수님을 전해주었어요.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캄캄한 밤에 빛을 만난 거 같았어요. 그 전까진 어둠 속에서 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 늘 고민하는 삶을 살았는데 예수님은 제게 한 줄기 빛과 희망이었어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죠.
Q 예수님으로 인해 교수님 삶의 변화가 있으셨던거네요.
저라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어요. 하지만 제겐 우선순위가 있어요. 제 우선순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에요. 제 욕심과 사명의 갈래길에서 전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했어요. 전 예수님이 너무 좋아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예수님의 한 발자국이라도 닮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예수님께서도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리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 하셨잖아요. 저도 그런 예수님을 닮아 아직 가족상봉을 하지 못한 분들의 상봉을 위해 온힘을 다 쏟고 싶어요.
제 별명이 불나방이예요.(웃음) 불나방은 불빛이 보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불빛에 뛰어들잖아요. 전 실종자찾기에 그런 마음이 있어요.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서 망가져도 좋고, 경찰복을 벗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함께 아파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Q 경찰이란 직업이 밤낮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실제로 그런가요?
정말 밤낮이 없는 직업이죠. 특히나 저 같은 경우는 실종가족 찾아주기를 일을 했으니까 해외에서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시차 때문에 한국 시간 밤에도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경우였죠. 출근도 일찍해야 하고 수사를 하다보면 밤 늦게 까지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솔직히 가정에 더 충실하지 못한 점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해요. 마음은 정말 더 잘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항상 안타까워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경찰관을 하면서 너무 바쁘게만 산 것 같아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실종가족에 대한 애정이 인간적인 마음 뿐이었더라면 오래가지 못했을텐데 제게 이 일은 사명이었어요. 제겐 사명이 목숨보다 귀하다고 생각되거든요.
Q “함께 아파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라는 실종가족 찾기 문구가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이 문구는 누가 만든건가요?
제가 만들었습니다. 가족찾기는 ‘진심,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거든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아파하기 마련입니다. 내 부모, 내 자녀, 내 가족을 잃어버렸는데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까요? 그 아픔이 공유가 되니 이건 머리로 하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런 슬로건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람찾기는 제 천직입니다
Q 2002년 이후 5600여명의 실종가족을 상봉시켰다는 건 경찰로 재직하시는 동안 하루에 한 건 이상의 상봉을 성사 시켰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싶었어요. 교수님 만의 사람찾는 노하우가 있을까요?
사람 많이 찾는 노하우는 없어요. 그냥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제겐 사람을 많이 찾은 것보다는 찾지 못한 분들께 죄책감이 있어요. 그래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거죠. 연구를 해서 “환경조사분석기법”이라는 것을 고안해냈어요. 실종자의 환경을 분석해서 가족을 찾는 방법을 고안해 석사논문을 썼고, 실종수사 개선방안에 대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학위가 필요해서 공부한게 아니라 가족을 잃은 분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고 가족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에 연구도 하게 되고 학위까지 따게 된 거죠. 실종가족을 향한 제 진심과 사명에 열정이 노하우가 된 것 같아요.
Q 실종가족을 찾으시면서 힘든 점이 많으셨을것 같아요.
사람찾기 자체로 힘든 적은 없었어요.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아팠던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과정이지 사람찾기가 힘들다고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오해 때문에 힘든 적은 있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실종가족찾기 위해 TV 프로그램 출연을 한 10년정도 했는데, 유명세를 타서 성공하려고 사람찾기를 한다는 오해를 받았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아, 그리고 제 팔을 보시면 왼팔이 휘어져 있어요. (실제 왼쪽 팔이 똑바르게 펴지지 않고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예전에 사고로 팔이 부러졌는데 공교롭게도 수술날짜와 미국에서 온 실종가족의 상봉날짜가 겹쳐서 상봉을 시키고 수술을 하겠다고 수술 날짜를 미뤄버렸거든요.
전 그때는 몰랐어요. 원래 뼈가 부러지면 뼈에서 진액이 나와서 저절로 붙어버린대요. 치료를 못받은 상태에서 부러진 뼈가 그냥 붙어버리는 바람에 팔이 휘게 되었죠. 미관상으로 보기 안좋은 것 뿐만 아니라 팔이 시큰거리고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거나 왼손으로 하는 일의 정확도가 떨어지게 되었어요. 특히 제 아내가 속상해하는 걸 아니까 너무 미안했죠.
제가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거나 편견과 오해를 설명하느라 진을 뺐다면 실종가족을 찾아주는 일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 일을 계속하기도 힘들었을거라 생각해요.
Q 우리나라에서 실종가족찾기에 한계점이 있다면요?
공인 탐정법이 발효되지 않은 것이 한가지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OECD국가에서 저희 나라에만 탐정이 없어요. 사람찾는 수사는 경찰에서 모두 담당하고 있는데, 실제로 경찰임무에서 사람찾기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한 업무입니다.
탐정법이 발효되면 더 많은 사람들을 활발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나 지금은 탈북민들이 가족을 찾으려는 경우도 많고, 앞으로 통일이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찾으려고 할텐데 지금의 경찰 인력만 가지고는 진행이 더딜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경찰의 업무는 실종자에 한해 사람을 찾다보니 입양아 같은 가족찾기에 있어서는 더더욱 한계점이 있구요.
경찰에서 교수로의 새로운 시작
Q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이 있으시다면요?
참 감사하게도 얼마 전에 경위에서 경감으로 승진이 되었고, 2월말에 경정으로 또 승진을 하고 경찰을 은퇴하게 됩니다. 무궁화를 달고 명예롭게 경찰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제 경찰에서 교수의 삶으로 큰 변화를 앞두고 있는데요, 지식과 마음을 전달하는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고, 계속해서 경찰 후배들을 키워낼 생각입니다. 또한 탐정법이 통과되면 탐정으로 활동하면서 다방면으로 가족찾기에 열심을 내고 싶습니다. 통일이 될 때를 대비해서 더 많은 가족들을 조속히 연결해 줄 수 있도록 연구하고 노력할 계획입니다.
사람찾기는 잘할지 몰라도 다른 부분에 있어선 빵점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이건수 교수. 그런 솔직한 그의 삶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인터뷰였다.
김미현 황인영 기자
상봉인터뷰: 63년만에 다시 만난 오누이
이건수 교수 카페 http://cafe.naver.com/gpdjwlsrkwhr
경찰청 공식 블로그 폴인러브 http://polinlove.tistory.com
이건수 교수 저서 소개
눈부신 희망 182 실종아동찾기센터 이건수 추적팀장이 전하는 기적 같은 상봉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