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이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가지 일을 거치면서 학생 국제교류 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고 그 일이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했다. 기댈 사람도 세상 말로 빽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뉴욕 할렘에 있는 데모크라시프렙 공립학교의 한국 수학여행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한국어를 필수로 배우고 매년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나온다. 그 일을 3년쯤 진행하다 전남교육청과 연이 닿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교사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알게 된 페어팩스 카운티(Fairfax County)의 ‘문일룡 위원님’의 도움으로 전남교육청과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청의 국제교류 MOU를 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을 가장해 일어났다. 데모크라시 프렙의 한국 자매학교를 찾아주기 위해 전남교육청에 연락했다가 그에 덧붙여 생각지도 않게 페어팩스와의 MOU까지 체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올 해 9월, 페어팩스 교육청분들(문위원님, 부교육감과 2명의 교장선생님)이 전남교육청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사람으로는 최초로 교육위원 5선이신(*미국은 교육감이 아니라 교육위원을 선거로 뽑는다.) 문일룡 위원님의 강의가 여수의 충무고등학교에서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지겨운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가족이 미국 이민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영어를 못하는 동양인이 할일은 청소나 막일 뿐이어서 어머님은 밤늦게까지 청소 일을 하셨다. 고생하는 엄마를 기쁘게 하는 길은 공부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영어도 잘 못하던 동양인이 3년만에 하바드에 입학했다. 그리고 로스쿨을 나와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었다.
여기까지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위원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예전에 자신이 했던 다짐을 기억하고,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선거에 도전한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시아인이 많지 않고 중상층 백인들이 주로 사는 페어팩스였다.
한 집 한 집을 찾아다니면서 선거 유세를 할 때면 모욕과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한국인 최초로 교육위원에 당선되었다. 그게 18년 전의 일이고 지금까지 문위원님은 페어팩스 카운티의 유일한 아시아계 교육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분의 살아온 여정을 들으며, ‘아! 내가 MOU를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 내 노력으로만 된 것이 아니었구나.’를 깨달았다. 오늘의 결과는 오래 전에 이 분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분이 나 하나 잘 살야지, 돈을 더 벌어야지, 더 좋은 차를 타야지, 더 넓은 집에 살아야지 생각하셨다면, 아마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것을 포기하고 남을 위해 사는 삶이 주는 영향력은 내 생각보다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헌신‘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난 길을 걷고, 사막에서 물을 마신다.
문위원님이 한국 방문 중 내내 들고 다니시던 낡고 작은 등산 배낭의 지퍼가 결국 고장나 버렸다. 그 낡은 가방의 지퍼를 보며 이분의 낡은 가방이 어쩌면 여러사람에게 길을 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시간을 쪼개가며 남을 도우며 살아온 이 분의 삶에 함께 했던 그 낡고 작은 가방이 귀하게 새삼 귀하게 보였다.
누군가 뿌려놓은 헌신의 발자국들이 인도자가 되어 언젠가 내가 가야할 길을 비추어 주겠구나. 그리고 언젠가 내가 한 헌신이, 또 누군가의 길을 내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는 용기가 생겼다. 이런 삶이 바로 현실에 바탕을 둔 B&R이 아닐까.
고장 난 가방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지퍼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문위원님이 못내 안타까웠던지, 함께 방문한 교육청 관계자들이 관광 중에 틈을 내어 멋진 등산 배낭을 사서 선물했다.
“A present for you from three amigos.”
물은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나 사랑은 반드시 시작된 곳으로 돌아온다. 내가 내 것을 채우려고 살지 않을 때 길을 돌아돌아 오는 신의 선물이 있다. 내가 한 헌신이, 흘려 보낸 사랑이, 결국 내게 돌아온다.
글: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