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 사이즈 여성 의류 브랜드인 ‘빌드’에서 출고되는 모든 제품을 기획하고, 디자인과 스타일링을 총괄하는 빌드 디자인 연구소의 김주현 실장을 만나 사람을 살리는 옷을 만들고 싶어하는 그녀의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Q 원래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게 꿈이셨나요?
아니예요.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제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예요. 사실 어린 시절부터 패션을 좋아하기는 했어요. 어릴 적에 아버지가 지금의 청담동과 같았던 명동에서 부띠끄를 운영하셨어요. 당시 많은 제자를 키워내신 패턴 선생님이셨죠. 어머니는 디자이너로 아버지와 함께 일하셨구요. 그래서 집에는 늘 해외 컬렉션 잡지가 있었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작품들을 예쁘게 오려서 인형 놀이를 하곤 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기 참 좋은 환경이였는데 왜 어렸을 때 디자이너의 꿈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어쩌면 제가 처음부터 디자이너를 꿈꾸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빌드를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웃음)
Q 지금은 플러스 사이즈 옷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긴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브랜드가 거의 없었는데, 어떻게 빌드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빌드는 단순한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결혼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엄청난 체형의 변화를 겪게 되었거든요. 169cm라는 제법 큰 키에 55~66의 중간 사이즈 였던 제가 임신 중독증에 걸리면서, 출산 후 99사이즈도 작아질만큼 몸이 불어난 거죠.
그런 제게 옷이란 그저 맞으면 입는, 단순히 몸을 가리기 위한 것에 불과했어요. 그때 제가 느낀 소외감은 제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고, 대인 기피증까지 불러 올 정도로 심한 박탈감을 갖게 되었어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그 누구보다 패션을 즐기고 자신감 넘쳐했던 저의 변화에 충격을 받았고, 기존의 패션 패러다임을 벗어난 새로운 패션 브랜드를 기획할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여성이라면 누구나 패션을 통해 자신을 당당하고 아름답게 표현 할 수 있어야 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이 세상적인 기준에 가려지지 않도록 돕는 특별한 브랜드를 시작해야 겠다고 마음먹었죠. 오랜 기간 의류 매장과 온라인 몰을 경영하던 남편과 샵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로서 일해온 저였지만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실제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몰랐기 때문에 디자인 브랜드를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 무모한 도전이었죠. 하지만 2008년, 그렇게 빌드가 시작되었어요.
Q 빌드라는 브랜드를 시작하고 나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용감하게 도전장을 냈지만,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개인적으로는, 디자이너로서 처절한 노력을 해야 했어요. 잘 모르는 분야로 새롭게 도전하는 것은 많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잖아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점은 생산 공장들이 빌드의 제품을 만들기를 꺼려했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플러스 사이즈”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시기였어요. 여성 의류, 그것도 오피스 룩에서 큰 사이즈의 옷은 찾아 볼 수 없었죠. 큰 사이즈의 옷은 실루엣이나 라인의 형태가 없이 그저 박스로 이루어진 옷들이 대부분이였으니까요.
빌드의 제품들은 최소 3~5개까지의 사이즈 구분이 있고 30~40대 여성이 가지는 특유의 체형과 패턴 때문에 그것을 완성도 있게 만들어 줄 공장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44~55사이즈를 만드는 일반적인 의류 공장에서는 큰 옷 자체를 취급하기 싫어했던거죠. ‘이렇게 큰 사이즈의 오피스 룩을 누가 사 입겠느냐, 옷이 커서 재단판 위에 올라가지 않는다’라는 핑계를 대며 문전박대를 하기 일수였어요. 제품을 제대로 만들어 줄 공장을 찾는 데 많은 애를 먹었고, 그 결과 기획했던 제품들은 예정했던 시기보다 늦게 출고되었어요. 계절과 시즌이 제일 큰 영향을 차지하는 의류 사업에서 늦은 출고는 고스란히 재고로 연결되었죠.
Q 그때에는 정말 포기하고 싶으셨을 거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결정적으로 빌드의 대표님(참고로 제 남편이예요)이 그러더군요. 남들이 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일거라고요. 또 그만큼 이 일을 원하는 분들이 계실거라고 말이죠.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어 도전했고 두 번째 시즌 제품은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은 분들이 구매를 해 주셨어요.
그때 전화나 메일로 고객님들에게서 많은 피드백을 받았어요. 정말 이런 옷을 원하고 있었다고요. 옳다고 믿는 것을 신념을 가지고 계속하다보면 언젠가 진심은 통하게 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Q 혹시 기억에 남는 고객의 피드백이 있다면요?
어떤 고객님께서 메일을 보내 주셨는데, 그 고객님도 저처럼 결혼과 출산을 통해 급격한 체형의 변화를 겪은 분이었어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우울감까지 생기셨대요. 육아 휴직이 끝나고 복직일이 다가오는데 출근해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넘어 공포로까지 연결되었대요.
복직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검색하다가 빌드를 알게 되었는데 저희 디자인을 보고 깜짝 놀라셨대요. 헐렁하고 두리뭉실한 티셔츠가 아닌 좋은 소재에 여성스러운 라인이 들어간 스타일에 말이죠. 반신반의 하며 구매를 하셨는데 제품을 실제로 받아보고 나서 ‘그래 나도 여자구나, 아름다워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자신감이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고요.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일깨워준 빌드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빌드가 오래도록 함께하는 브랜드가 되기를 바란다고 써 주셨어요.
그 메일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몰라요. 우리가 하는 이 일이 단순히 옷을 만들어 파는 일이 아니라 옷을 통해 누군가의 인생에 행복을 심어주고 자존감을 세워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찬 감동으로 남았어요. 이 후로도 많은 고객분들이 메일이나, 손 편지, 저희 웹사이트 리뷰를 통해 빌드를 향한 사랑을 전해주고 계시답니다. 고객님들이 전해 주시는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저 또한 최선을 다해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Q 본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성이란 어떤 여성인가요?
자신의 삶에 진정성이 있는 여성이요. 사실 아름다움에 대한 외적인 기준은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잖아요. 제가 보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여성도 본인의 외모에 만족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자신의 가치가 타인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의 기준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존감에 있지 않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비교 의식”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런 기준에서 볼때 아름다운 여성이란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자신만이 가진 고유의 독창성을 매력으로 여기는 사람인 것 같아요.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들도 있지만, 그런 부분들도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알기에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여성이요.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방관 혹은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여성! 저는 이런 여성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Q 인생을 살면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면요?
재작년 겨울에 몸에 이상이 있어서 병원을 찾았어요. 단순히 피곤이 누적되어서 임파선이 부었나보다 했는데, 초음파 결과, 갑상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처음 의사 선생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데, 갑자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떨어지더라구요. 아직 젊은 나이고 평소에 체력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암이라니… 어린 딸과 남편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죠.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기까지 두 달여 정도의 시간이 있었어요. 마음이 힘들긴 했지만 그 두 달 동안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어요. 아침에 눈을 뜨고 맞이하는 새로운 하루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나의 가족들, 직장 동료들, 친구들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요. 더불어 제 주변에 저를 사랑해주고 기도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멋진 풍경도, 맛있는 음식도, 아름다운 음악도 모두가 다 제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 이후로 제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지금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 하는 것! 그것이 수술을 기다리는 두 달이 준 가장 큰 선물이었죠. 지금은 힘들었던 그 시간들이 오히려 제게 가장 행복한 시간들로 기억되네요.
Q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옷이 있다면요?
이제까지 빌드의 상품들은 모던한 컬러와 절제된 디테일이 주를 이루었어요. 빌드는 숨가쁘게 변화되는 트랜드의 흐름을 따라가는 브랜드라기보다는 지적인 감성의 디자인에 좋은 소재, 체형을 커버하면서도 편안한 피팅감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브랜드예요. 현재의 모던한 베이스에 페미닌한 감성을 조금 섞어서 여성스러운 스타일의 디자인도 만들어 보고 싶어요.
빌드에서만 볼 수 있는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소장가치가 있는 아이템도 만들어 보고 싶구요. 고객님의 옷장에 나만의 시그니쳐 아이템으로 남을 만한 디자인을 선사하고 싶다고나 할까요. 빌드의 옷을 통해 고객님들이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패션을 즐길 수 있게요. 물론 현재까지 최선을 다해 유지하고 있는 합리적인 가격에 대한 원칙은 열심히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Q 앞으로의 이루고 싶은 꿈이나 비전이 있다면요?
단기적으로는 빌드의 오프라인 매장을 런칭하는 것이예요. 올해 9월을 시작으로 오프라인을 통해서 더 많은 고객님들을 만나고, 매장에서 쇼핑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어요. 가끔 고객님들이 오프라인 매장에서 신나게 쇼핑하던 시절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오프라인 매장을 열게 되면 자연스럽게 고객님들의 의견을 반영한 상품들도 선보일 수 있겠죠. 나아가서는 오프라인을 통해 고객님들과 의미있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은 바램도 있어요. 블레싱과 릴렉싱을 느낄 수 있고 또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공유하는 만남의장을 만들고 싶어요. 곧 오프라인 매장에서 여러분들을 만날테니 많이 기대해주세요.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