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자녀였지만 우울증으로 고통받다 하나님을 만나 기독교 웹툰작가로 활동하는 김초롱 작가를 만나 그녀의 삶에 드러난 비앤알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Q 안녕하세요,작가님.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간단한 자기소개 부탁 드릴께요.
간단히 말하면 기독교 웹툰작가라고 소개할 수 있겠네요. 웹툰작가이긴 하지만 네이버나 다음 같은 회사에 소속되어있는 작가는 아니고 제 개인 SNS를 통해서 웹툰을 연재하고 있어요.
Q ’초롱이와 하나님’ 웹툰을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너무 잘 보고 있어요. 캐릭터가 귀엽기도 하면서도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신앙적 고민, 말씀들이 진지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져 있는것 같아요. 처음에 웹툰을 그리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제가 목사님 딸로 자랐지만 25살에 예수님을 진짜 만났어요. 만나고 나니 교회 주일학교 봉사 열심히 하는것 말고 내가 진짜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갓피플이라는 웹사이트에서 작가공모라는 배너를 보는 순간 심장이 뛰었어요.
제 전공은 산업디자인이에요, 잡지사에서 편집디자인 일을 오래했어요. 그런데 회사일과 별개로 순수하게 드릴 수 있는 걸 생각했어요. 그때는 캐릭터도 없었는데 빨리 지원하고 싶은 마음에 지금의 단순한 캐릭터에 스토리 10개 만들어서 올렸는데 당선이 된거에요.
그래서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으로 주말에 짬짬히 올리게 되었어요. 그때는 웹툰이 붐이던 시절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꾸준히 하다가 퇴사하고 선교사로 나갔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웹툰시장이랑 인스타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더라구요. 그동안 그려놨던 것들을 인스타에 올리게 되었어요. 오랫동안 봐주시던 분들도 오시고 인스타 하는 친구들도 보고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인스타에 웹툰을 올리는 것은 수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그냥 중간 매체가 되는거에요. 웹툰을 보는것 자체로 수익이 나는건 아니지만 그걸 통해서 일을 할 수 있는것이지요. 드로잉클래스를 한다던지 굿즈(Goods)를 판매하거나 책을 내는 등 통로의 역할을 하는거에요. 돈을 벌고 수익을 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더 중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제 시간을 내고 투자를 하는거죠.
Q 이야기를 듣다보니 작가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 지는데요. 학창시절(중,고등학교) 때에는 어떤 아이이셨나요? 그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으셨나요?
어렸을 때의 저는 목사님이신 아빠에게 순종적이고, 교회에서 시키는거 다 하면서 제 의견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버님이 목사님이시니까 내가 반항적으로 대들면 안되고 조용히, 시키는 대로만 하는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았어요. 그렇게 살다가 대학에 가서 ‘빵’ 터진거죠.
고 3 때 1지망으로는 힌국외대를 지원했고, 3지망이 비어서 담임선생님 추천으로 그냥 한동대를 썼어요. 한국외대를 당연히 붙을 줄 알았는데 떨어졌어요. 한동대 갈 때 울면서 갔죠.
면접 볼 때 교수님이 큐티하는지 질문하는데 ‘아니요’ 라고 대답했어요. 옆에 지원자는 신앙간증을 하고 마지막 남자 학생은 울기까지 했는데 말이예요. 저는 속으로 ‘망했다’, ‘떨어졌다 ‘ 생각했는데 합격했어요. 그렇게 학교를 들어가다 보니 학교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제 인생의 암흑기라서 아는 사람이나 친구도 별로 없어요.
Q 대학 시절 내적 고통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학교에 남학생 비율이 많아서 좋았어요. 그 때 남자친구가 안 믿는 친구였는데 술, 담배를 가르쳐줬어요. 그런 거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였는데 남자친구를 만나다보니 당황스러운 일들이 많았어요. 술도 마시고 남자친구와도 갈등이 있다보니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때는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날 괴롭게 했어요.
어떤 친구가 ‘하나님은 우리 엄마보다 날 더 사랑해’ 라면서 눈물을 그렁그렁 하는데 저는 이해를 못하겠더라구요. 느끼지 못하니까 괴리감도 심해졌어요. (아빠) 교회는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부유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대학 가서 보니까 집이 잘사는 친구들이 많아서 빈부격차가 확 와 닿았어요. 그 때부터 우울증에 깊게 빠지게 되었어요. 사는 이유도 모르겠더라구요.
결혼을 잘 하고 좋은 대우 받고 그런 게 내 삶의 목표는 아닌데 다들 그걸 향해 뛰어가니까 그게 내 삶의 목표가 아니라면 살 이유가 없지 않나 생각했어요. 하나님도 모르겠고, 내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이 오면서 자해, 자살시도, 우울증까지 이어졌어요. 제일 정점을 찍은게 4학년 2학기 때였어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시간이에요.
Q 우울증으로 어떤 증상이 있었나요?
우울증이 복합적인 질병이예요. 사랑받고 싶은데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가벼우니까 사랑을 원하면서도 증오스러운 느낌이 공존해요. 매일 눈 뜨자마자 울고, 기숙사 샤워 커튼을 보면서 여기다 목 매달아서 죽을까, 창문 위에서 떨어져서 죽을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정말 말 그대로 생지옥이에요. 특히 자해, 자살시도를 하면서 갈수록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거든요.
제가 웹툰을 그리면서 우울증 있는 친구들을 도우려는 이유는 내가 그 마음을 아니까, 누구 한 명에게라도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느낌을 아는 게 중요하니까. 얼마나 힘들면 나한테까지 DM을 보낼까 하는 생각 때문이예요.
그 와중에 3학년때는 인도 선교도 갔었어요. 그 때는 공동체도 좋았고, 인도니까 특별한 느낌도 들었어요. 사실 거기서 만난 하나님도 분명 있었어요. 그런데 나의 문제와 내 정체성을 십자가에 놓지 않으면 그건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은 거에요. 내가 교회에 가고 선교도 간다고 해서 삶의 방향성과 중심이 잡히는 건 아니잖아요. ‘왜 사나?’ 라는 질문에 답을 전혀 할 수 없어요. 그 때부터는 본인과 싸우다 행동으로 옮기는 거에요.
Q 참 힘드셨을 것 같은데, 그 기간을 극복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제일 우울증이 심했었을 때가 저희 교회 장로님이 C국선교를 시작하셨을 때인데, C국에서 종교를 굉장히 심하게 핍박하던 때라 위험했어요. 저희 교회가 되게 작은데 C국 선교 갈 사람이 없어서 저한테 가자고 하셨죠. 힘들었어도 제 안에 순종하는 마음은 있으니까 거절을 못하고 가겠다고 했어요. 기억나는게 강의실 테이블에 성경책 던져놓고 이번에 C국 가서도 하나님을 못 만나면 평생 그냥 부인하고 살겠다라고 결심했어요.
그렇게 갔는데 C국 현지 상황은 저한테 충격적이었어요. 정말 열악하고, 쥐가 뛰어다니고, 여름인데 선풍기도 없어서 덥고, 악취가 나고… 그런데 10대, 20대 친구들이 7월인데 너무 기쁘게 찬양하고 예배 드리는거에요. 자기는 가난해서 하나님께 드릴 게 없으니 자신을, 자기 인생을 드리려고 왔다는 거에요. 그들을 보는데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나는 대학도 다니고, 누울 자리도 있고, 삼시세끼 다 먹는데 왜 내 안에 행복이 없을까. 하나님이 진짜 계시지 않는다면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건 있을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도 C국 갔다 와서 여전히 나와 싸우고 자해하고 뜯고 그러다가 태국에 선교활동을 갔어요.
보통 우울증으로 인해 했던 일들은 혼자 감추고 있잖아요. 그런데 거기 선교사님께서 내가 혼자 자해하고 있었을 때도 옆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마음이 열리더라구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창조하셨다는 걸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는데, 그런 분이 나를 기억하고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정체성을 찾은 거예요. 사랑을 찾아서 그렇게 헤맸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 들면서 내 존재의 이유도 알게 된거에요.
그 때부터 하나님이 누군지 알고 싶다고 느꼈어요. 또 나도 하나님께 뭘 드리고 싶다고 생각해서 만화를 그리게 되었어요. 교회에서 그동안 했던 봉사들은 타인의 요청에 의해서 한 건데 웹툰을 그리는 것 만큼은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느꼈어요. 어느 누구도 내게 시키지 않고 그냥 자발적이고 순수한 동기였어요.
Q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가장 크게 바뀐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대학교 졸업 이후의 초롱 작가님의 삶은 어떠셨는지도 궁금해요.
제가 유학을 하고 싶어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유학 자금을 모으면서 준비하게 되었는데, 그때 집에 빚이 있다는 걸 성인되서 알게 됐어요. 유학을 갈까 빚을 갚아야 하나 기도하던 중에 ‘부모한테 하는 것이 나한테 하는 거다’ 라는 감동을 주셔서 내가 갚겠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금액이 너무 컸어요.
알바도 하고, 회사도 두개 다니면서 유학자금을 빚 갚는 데에 썼어요. 그렇게 빚을 다 갚고 보니 스물 아홉이 된 거에요. 그래서 20대 후반 기억이 잘 없어요. 저는 원래 픽사 가는 게 꿈이었어요. 캘리포니아에서 공부하다가 픽사로 넘어가고 싶었는데, 빚을 갚고 나서 보니 꿈이 없더라고요.
한국에서 살기가 싫어져서 어학연수를 갈까 생각도 했지만 나이도 많아지고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호주로 예수전도단 훈련인 DTS를 갔어요. 그때 하나님을 깊게 만나고, 지금의 내 정체성이 다져졌어요.
Q 호주에서 영어로 예수전도단 제자훈련을 받으신 거죠? 어려운 일은 없으셨나요?
사실 제가 영어를 못했었어요. 제가 있던 그룹은 저보다 어린 친구들만 있어서 너무 창피했어요. 첫날 엉엉 울면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들 다 웃고 떠드는데 나만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니까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거든요. 영어 못하는, 나이 많은 아시아인이라는 참담한 느낌? 그 때 한국인 간사님들이 조금만 더 버텨라고 해주셨어요.
그런데 일주일 후에 숙제를 영어로 쓰라는 거에요. 영어도 못하는데 쓰다가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이게 맞는 거냐고 기도하면 응답해주실 것 같아 멍을 때리고 있었어요. 그 때 핸드폰을 만지지도 않았는데 노래가 갑자기 휙휙 넘어가면서 테이프 미리감기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핸드폰이 꺼졌어요. 폰도 맛이 갔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혼자 다시 켜지더니 자동으로 음악이 재생되는거에요. 제 플레이리스트 수많은 가요 속 단 하나 뿐이던 ‘He will answer when you call’(네가 부를 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이라는 찬양이 딱 켜졌어요. 그 때 ‘하나님은 계신다’ 라고 느끼고 그 이후부터는 열심히 훈련을 받았어요. 그렇게 호주에서 2년 지나니까 강의 통역도 할 정도의 영어실력이 되었어요.
회사를 서른 살까지 다니다가 호주 선교를 3년 반 동안 갔다가 한국에 다시 오니까 경력단절이라 일을 구하기 어렵더라구요. 그리고 다시 디자인 업계로 가고 싶진 않았어요.
미술관에 취직하려고 토익도 공부하다가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던차에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연락이 왔어요. 책 출판을 하면서 웹툰 작가의 길이 열렸어요.
Q 웹툰을 통해서 많은 크리스천(또는 비크리스천) 분들과 소통하게 되시는데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을까요?
‘서울 일러스트 페어’라고 되게 크게 열리는 전시회가 있어요. 작년 겨울 말레이시아에서 온 한국인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아빠 몰래 절 만나러 아침에 도착해서 왔다는 거에요. 그날 독일에서 온 친구도 있었는데 멀리서도 응원해주는 팬이 있다고 말해주고 저를 꼭 안아주면서 기도를 해주겠다고 하는데 눈물이 나는 거에요. 특히 공황장애, 우울증이 있었다가 저로 인해 이겨냈다는 분들을 통해 저도 나아갈 힘을 얻고 보람을 느껴요.
Q 초롱 작가님의 앞으로의 비전과 계획,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저는 대학생 때 서점을 가면 다 너무 어려워서 만약 혹시 이런 쪽에서 일하게 된다면 새신자 등이 부담없이 볼 수 있는 그런 책들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아예 웹툰작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다음이나 네이버 쪽을 다른 시나리오로 두드려보고 싶어요.
글. 김정아,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