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 박사의 책에 관심이 생겼던 것은 그가 모 방송에서 나와 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주목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단 한명만 있어도 사람은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이 말 한마디에서 나의 피곤했던 영혼이 이해되었고, 내가 지금껏 살아오고 버텨올 수 있는 힘이 된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찾아보게 된 책이 바로 “당신이 옳다“이다.
내 위에 붙은 껍데기들을 벗어버리고 진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그 질문 자체를 생각해본 적도 없는가. 나는 과연 누구인가…
존재자체를 몸에 비유한다면 외모, 권력, 재력, 재능, 학벌 등은 몸을 감싼 여러 겹의 옷들이다. 넘치는 관심과 주목을 받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 아니라 그걸 걸치고 있는 옷에 대한 주목이나 찬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직장이나 학위, 직업 등이 ‘나’가 아니듯 내 돈, 권력, 외모나 재능도 당연히 ‘나’ 자체가 아니다.
지인 중 하나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그가 한달에 벌어들이는 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검찰에 고발이 되고, 믿었던 동료의 배신으로 직장과 돈을 모두 잃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무얼 하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동안 나라고 알고 살아온 것이 내가 아닌거 같다고 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사실 진짜 나에 관한 깨달음은 대부분 나라고 생각한 것을 잃었을 때 온다. 내가 가진 재산을 잃었을 때, 내가 자랑한 건강을 잃었을 때, 당연히 나 인줄 알았던 직장에서 쫒겨났을 때, 내가 자랑하던 외모가 무너졌을 때, 단단한 소라껍질 속에 감춰진 연한 속살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주목을 받지 못하면 심한 결핍이 생긴다. 언제나 혼자라고 느낀다. 이런 관계들 속에서 다 가진 자는 금은 넘쳐나는데 쌀은 한줌도 이상한 기근을 겪는다. 금이 없어도 쌀이 있으면 살 수 있지만 금이 산더미같이 있어도 쌀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진정한 나에 대한 고민이 생기고 나면 공허함과 허전함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 또한 가짜의 나에서 진짜의 나로 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평생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마치 기름이 줄줄 새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존재에 대한 주목이 삶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질주하다 현실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데 사이버 세상에선 다 가진 떼부자인처럼 되기 십상이다. 다 가진 것 같지만 금괴 더미 안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대한 인정과 주목을 존재에 대한 주목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에 더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먹어도 기대만큼 포만감이 없다. 밥 없이 반찬으로만 배를 채운 사람처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편안한 포만감이나 포만감으로 인한 안정감이 없다. 반찬으로 채운 배는 한계가 있다.
이 공허함과 허전함을 메꾸려면 진정한 공감자를 만나야 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봐주는 그 한사람. 바로 그분이다. 그분만이 나를 아무것도 씌워지지 않은, 역할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보아주고 공감해주고 사랑해주신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 씀에 대한 반응이다. 공감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있는 차돌같은 안정감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처럼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을 확보한다.
그렇게 주목받고 공감받은 사람은 이 세상을 견고하게 버텨낼 수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책망하지 않고, 성공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오롯이 역경을 견뎌내고 그 경험으로 더 큰 산을 넘는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이고, 이런 힘은 또 다른 사람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앤알이다.
글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