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유난히 파랗던 아침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나서던 길이었는데 거리의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상층부가 화염에 휩싸여 불타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초대형 화재현장을 보게 된 적도 처음인데다 미국의 경제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에서 일어난 일이라 주변 상황이 여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당국의 발표로 이것이 한 테러단체의 소행으로 알려졌고, 내가 서있던 자리에서 불과 몇 블록 안 떨어진 그곳에서도 쾌청한 가을 아침을 마주했었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고없이 곁을 떠나면서 도시는 돌연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9월 11일이었다.
당시 나는 전공을 되살려 시각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뉴욕에 막 이사했을 무렵이다. 그런데 새로운 삶의 시작과 함께 전 세계가 주목할 정도의 사건이 바로 눈 앞에서 터지면서 꿈은 커녕 또 다른 위험이 내게 닥치지 않을까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우울했다. 그렇게 2년을 테러가 남긴 후유증과 씨름하면서 난 몹시 지쳤고 하루빨리 뉴욕을 떠나고 싶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살던 내게 2008년 다시 뉴욕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기필코 이번엔 그곳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어 야심차게 이주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초대형 대부업체들이 파산하면서 이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뉴욕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경제활동이 마비되는 위기가 찾아왔다. 수많은 이들이 하루아침에 직장과 가정을 잃었고, 다시 한번 꿈을 품고 뉴욕에 막 도착한 나는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일자리가 사라져 당혹스러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나는 또다시 낙심한 채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제국의 도시에서 암울한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한 원망만 쌓이던 어느 날, 정한 곳 없이 시내를 거닐던 나에게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적어도 내게는. 정오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잠시 한 건물 입구의 차양막 아래에 몸을 숨겼는데 공교롭게도 그 차양막 뼈대의 일부가 햇빛을 가리면서 생긴 박쥐 형상의 그림자가 발 밑에 깔려있던 것이다. 그리고 더 가슴을 뛰게 만든 건 어둡고 우울한 마음의 방에서 날 구해줄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 베트맨이었다.
보기엔 이토록 용맹스러운 베트맨 마저도 영화에선 초기에 정신적으로 나약했던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런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조력자들은 “우리가 넘어지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지”라고 귀띔하며 베트맨의 사기를 북돋는다. 뉴욕에서 거듭 세상의 쓴 맛을 본 내가 베트맨을 만났던 날, 그 말은 마침내 나에게 건네는 그의 진심어린 응원의 메시지처럼 가슴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촬영장소: 뉴욕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으며, 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