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이라도 부르면 달려나가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탈북민들의 키다리 아저씨, 민경일씨를 만나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지금은 탈북민들의 키다리 아저씨이시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원래는 건설 회사를 다녔었는데 직장을 나오고 1998년도부터 사업을 시작했어요. 인테리어도 하고 다세대, 다가구 주택도 짓다가 2년이 지나고 나서는 부동산 개발을 병행했어요. 사업도 잘 되고 모든 것이 제 계획되로 진행되었어요. 그때 은행에서 600억을 담보대출을 가져다 써서 사업을 늘린 거죠. 그러던 차에 금융위기가 오고 2008년 초에 같이 일하던 연대보증이 되어 있던 건설회사가 부도가 났어요. 대출 이자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제가 우리 둘째 아이 방에 들어가서 엄청 울었어요.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일은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택시 운전이라도 해보려고 했어요. 사실 저처럼 철저하게 주일 성수 해본 사람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건 겉모습 뿐이었고 사실 내 내면의 신앙에는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그 상황에 가보니까 알겠더라구요. 2008년, 정말 저한테는 고난도 그런 고난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버티고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2009년도에 교회에 JDS(예수제자훈련)를 신청했는데 그 훈련을 통해 제가 한가지 느낀 것이 있었어요. ‘사업이 망한게 나에게는 축복이구나.’라는 것이요. 돌이켜보면 사업이 망하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그렇게 살았을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2009년도 하반기부터 북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Q 탈북민 사역을 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제가 2000년도에 연길로 출장을 갔어요. 연길에 좋은 사업이 있는 이야기를 듣고 간 것이었는데 들어간 첫날부터 사업 이야기가 잘 안되었어요. 저녁에 배고파서 시내에 뭐 좀 먹으려고 나갔는데 한 친구가 계속 따라 오는 거에요. 딱 봐도 북한 아이인 거에요. 탈북자,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꽃제비.
2000년도면,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96년에서 98년도까지였으니까 그때 굶어죽는 사람이 약 400만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그 즈음에 중국 연길의 골목 골목에 북한 애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너 누구냐? 왜 따라 오는 거냐?’라고 물어보니까 ‘당신 남한 사람 아니냐’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보면 안다’고 하는 거에요. 사실 그때만 해도 중국사람이랑 우리 나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차이가 있었거든요. 자기가 ‘먹을 것을 얻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아무 것도 없으니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밥먹으로 가니까 같이 가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잡힐까봐 못따라 오겠다’고 하는 거에요.
Q 그 아이는 몇 살 정도 되어 보였나요?
저는 10대로 봤는데 나중에 이야기해보니 20대 중반이 넘었더라구요. 따라오라고 하는 데도 못따라온다길래 ‘너 배 안고픈 것 같다. 나는 그냥 밥먹으러 갈 거니까 오고 싶으면 오라’고 했어요. ‘너 오면 내가 밥 사주고 내가 너 얘기 들어주겠다.’라고 했더니 결국은 따라 왔어요.
식당에 들어가서 먹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하니 불고기를 먹고 싶다 해서 시켜줬는데 엄청 큰 그릇으로 3개를 먹었는데도 더 먹겠다는 거에요. 그만 먹으라고 했는데도 ‘지금 안먹으면 언제 먹을지 모르는데 먹을 수 있을 만큼 먹겠다’라고 하더라구요. 그 때 당시 중국에서 사업을 해보려고 자주 왔다갔다 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건 하나님이 저를 탈북사역으로 부르신 부르심이었어요.
Q ‘하나원’이나 ‘하나공동체’가 어떤 곳인지 설명해주시겠어요?
하나원은 통일부 산하의 기관으로 탈북민(우리 정부 공식 명칭은 북한 이탈 주민) 이 남한 생활 정착 훈련을 하는 곳이예요. 보통 한 달에 100명 정도가 새로 들어와요. 김정일 집권때는 1년에 3,000명 정도가 들어왔는데 김정은 체제가 되면서 감시가 심해져서 절반 정도로 줄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제 하나공동체를 섬기고 하나원을 왔다갔다 하면서 하나님이 이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지를 봤어요. 그때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가 이 아이들을 책임지겠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내 사업, 내 가정, 우리 집에 있는 아이들 책임져 주세요. 그러면 제가 아버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북한, 북한 사람들을 보호하겠습니다.’
북한 사역에 전념하고 나서 사실 사업은 거의 신경을 못썼어요. 그래도 그 이후로 집에 생활비 안 준 적이 없어요. 큰 돈은 못줬지만 생활비 매달 줬고 아이들 등록금도 다 냈어요. 지금 보면 하나님이 저를 책임져 주신 거죠.
그리고 결국 그 빚을 다 갚았어요. 아내한테 빚 갚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 이제 빚도 없고 돈도 없다.(웃음)” 이 사역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와요. 하나님이 얼마나 이 일을 원하는지는 해보면 알아요.
Q 중점을 두고 하시는 사역은 어떤 것인가요?
작년 탈북민의 약 80%가 여성이에요. 그 중에서 20~30대의 여성이 60%가 넘어요. 즉, 20~30대 여성이 제일 많다는 거죠. 그런데 그 분들이 북한에서 받은 교육이나 지식으로 남한에 와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식당에서 서빙하는 거나 생산, 조립 공장에 가서 하루 종일 포장하는 거 말고는요. 이 땅에 와서도 결국은 최하층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주로 가장 집중하는 사역은 아이들을 공부시켜서 대학에 보내는 거예요.
중학교나 고등학교 나왔다는 아이들을 테스트를 해보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수준도 안돼요. 대학에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들어가서도 졸업을 하기가 어려워요. 보통 탈북 아이들은 대학에 특례로 수시입할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학점이 C 이상이 나와줘야 정부에서 등록금을 지원해주는데 아이들이 그 이상을 받지를 못하는 거예요.
Q 아이들이 공부를 못따라가서 그런가요?
이 아이들이 기초 생활 수급비로 생활을 하거든요. 6개월 동안 한 사람당 40만원 정도 받아요. 학교나 학원을 다니면 이 생활 수급비가 연장이 되거든요. 이거라도 받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돈으로 남한에서 생활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알바를 할 수 밖에 없어요. 지금 정신없이 공부를 해도 남한 애들을 따라갈 수가 없는데 알바까지 하니 공부는 뒤쳐지고 결국 학교를 중간에 그만둘 수 밖에 없어요.
Q 그럼 이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보통 대기업이나 큰 단체들은 북한 사람들을 돕는 자금들이 책정되어 있어요.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그런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요. 그래서 ‘어차피 내가 안가져가도 누군가는 가져가는 걸 뭐.’하는 식의 생각을 하게 되요.
대안학교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과 마트를 가서 과일을 고르는데 그 친구가 저한테 ‘이거 교회에서 해주는 거죠?’라고 묻더라구요. 그 계산 끝내고 나오면서 제가 ‘아니야. 반찬 가지고 오신 분도 자비로 하신 거고, 나도 자비로 한 거야.’ 그랬더니 이 친구가 기숙사까지 가는 동안 말 한마디를 안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차라리 몰랐으면 마음이 편했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이 아이들에게는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 이상의 사랑이 와야 돼요. ‘이렇게 까지 해줄 이유가 없는데… 이거 뭐지? 이 사람 뭐야?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제야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거예요. 어느 교회에서나 받을 수 있고 어느 기업에서나 받을 수 있는 그런 물질이 아닌 조건 없는, 온전한 사랑이 필요한 거죠. 제 주변에 문제 투성이 학생들이 많아요. 사고 치고 경찰서에서 연락오면 저는 밤 12시에라도 달려나가요. 피의자랑 합의해주고 사정하고 변호사 만나고 부모처럼 돌보는 거죠.
그래도 절대로 교회 가자는 말은 안해요.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고 나면 아이들이 물어봐요. ‘이거 왜 하세요?’ 라고요. 아이들이 이해가 안되는 거죠. 그런 아이들 중에 ‘내일 혹시 선생님 교회 가도 돼요?’하는 말이 나와요. 조건 없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라고 생각해요.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으신지요?
한 친구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 친구는 말그대로 사고뭉치에요. 20대 초반의 남자아이인데 사고를 쳐도 대형 사고만 쳐요. 4살 때 엄마가 데리고 중국으로 나왔고 10년을 중국에서 살다가 엄마가 북송이 됐어요. 엄마가 4년 동안 북한에 잡혀 있다 나와서 이 아이가 18살 때 다시 중국에 와서 같이 2년을 더 살았어요.
엄마가 북송되어 있는 4년 동안 이 아이가 중국인 양아버지에게 완전히 버림을 받고,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을 정도의 생활을 한 거에요. 그때 간질이 왔어요. 어떻게든 고치려고 했지만 결국 고칠 수가 없어서 한국으로 오게 된 거에요.
다행히 한국에 와서 약으로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얘가 받은 심리적 충격이 너무 커서 분노 조절이 안되는 거에요. 한 번은 엄마한테 심하게 대들다가 폭행을 해서 경찰서까지 갔는데 거기서 말리는 경찰을 폭행하다 벌금이 200만원 나오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자전거 타다가 인도에서 사람을 쳐서 제가 피해자까지 만나고 그랬어요.
이 친구가 저한테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세요? 저 포기 하십시오.’하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난 너 포기 못한다. 끝까지 갈꺼다’라고 했어요. 올 봄에 사고 치고 나서 형사하고 빨리 합의를 끝내야 해서 연락을 했더니 ‘왜 자기를 찾냐고. 나 잊으라니까 왜 찾냐고’라고 하더라요. 그래서 ‘내가 네 아빠다. 이 상태로 그냥은 못 보낸다’라고 했더니 ‘우리 엄마도 나를 포기했고, 이 남한도 나를 포기했고, 모두가 다 포기했는데, 왜 집사님만은 나한테 이러냐고’하면서 울더라구요. 그러면서 그 친구가 한 이야기가 ‘평생 내가 집사님한테 어떻게 빚을 갚으라고 나한테 이럽니까. 나 그 빚 못 갚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너는 나한테 빚 다 갚았다 벌써. 네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네가 나한테는 할 수 있는 것 다했다. 너하고 나하고는 빚도 없고 갚을 것도 없다. 부모 자식 사이에 뭐 그런게 있냐.’ 그랬어요.
그 친구가 얼마 전에 저에게 선물이 있다고 나오라고 하더라구요. 과일을 샀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가보니 과일을 7상자를 산 거예요. 저는 그렇게까지 많이 샀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가진 돈이 뻔한데. 안받을까 하다가 그 선물을 사며 나를 위해 무언가 해준다고 기뻐했을 그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서 받았어요. 그냥 그런 거 하나로 힘들었던 노력이 다 보상받는 거 같아요.
Q 탈북민들은 생사를 걸고 탈북했지만 한국에서 적응하는 것이 더 힘들 거 같아요.
4개월 된 애기를 목에 태우고 두만강을 건넌 가족이 있어요. 4개월짜리 아이를 목에 태우고 두만강 하류를 건너는데 거기는 강폭이 넓거든요. 아이가 자꾸 우니까 아빠가 ‘너 자꾸 울면 우리 다 죽는다’그랬더니 그 애기가 울음을 멈췄다는 거예요.강을 건너다 아이 아빠도 잠기고 아기도 물 속에 잠겼대요. 아무 소리가 안나서 물 속에 잠겨서 아이가 죽은 줄 알았는데 건너와 보니 아기가 자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어온 가족을 하나원에서 만났어요.
그런데 남한에 온 날부터 부부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에요. 남한 드라마를 보면 남자들이 너무 잘해주잖아요. 그러니까 부인이 남한에서 TV를 보고 ‘당신도 여기 남자들처럼 해봐라’ 하고 싸움이 시작된 거에요. 부인이 자궁 외 임신 때문에 수술을 하고 집에 누워 있는데 남편이 집안 일을 전혀 안해서 부인을 이틀을 굼겼더라구요. 북한 사회가 폐쇄적이다보니 남자들이 정말 가부장적이거든요.
어느 날은 부인이 저한테 전화를 하더니 자기가 ‘오늘 밤에 10층에서 떨어져 자살하겠다고,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하는 거에요. 가서 보니까 싸우고 나서 남편은 술마시러 나가버렸더라구요. 동네 술집을 다 뒤쳐서 그 친구를 만나 이야기했죠. ‘너 살려고 4개월짜리 애 목에다 업고 온 사람이 이 무슨 난리냐. 그래서 일단 내가 하자는 대로 해보자’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대요. 그래서 그 친구를 ‘아버지 학교’를 보냈어요.
사실 저는 아버지 학교를 수료했는데 제가 없으면 안가니까 다시 했어요. 첫날 숙제가 ‘허깅(Hugging)’이거든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자긴 ‘밤에 말고는 부인을 허깅 해본 적이 없다‘고 절대 못한다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너 이혼하려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어쨌든 숙제를 하더라구요.
허깅도 하고, 사랑스러운 이유도 써보고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이 남자가 한주 한주 변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지막 날은 세족식이잖아요. 결국 부인이랑 세족식을 하고 그 날 밤에 부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 밤새 울어서 한숨도 못잤다고요. 자기 남편이 어떻게 자기 발을 씻길 수 있는지 이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울더라구요. 내 평생에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그 다음날 아침에 남편이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버지 학교 밖에 없습니다’.(웃음) 내가 변했으니까 북한 남자도 바뀝니다. 지금은 그 친구가 아버지 학교 스텝으로 섬기고 있고 정말 그 가정이 행복하게 살아요.
Q 사역을 하면서 혹시 지치거나 힘들었던 때가 없으셨나요? 계속 사랑을 쏟아붓다 보면 힘들어서 지칠 때가 있을 거 같은데요.
최근에 우리 어떤 자매 하나가 그러더라고요. 저한테 ‘안 지치세요? 그만두고 싶지 않으세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없었어요. 아마 이게 내 열정이면 벌써 포기했을 것 같아요.
사실 북한 애들이 제 속을 썩인 건 제가 하나님 속 썩인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아이들이 저에게 거짓말하고 돈 빌려가고 그래서 안갚고 그런 것도 많거든요. 하지만 전 받을 생각 안 했어요. 그 친구 형편을 알기 때문에, 그 돈이 없으면 그 친구는 어떻게 보면 자살을 할지도 모르는 애에요. 돈 가져가고 연락 끊겨도 그냥 저는 기다리는 거에요.
Q 이야기를 듣다보니 보통의 사람들의 가치하고는 참 다르게 사시는 것 같아요.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안정, 최대한 편안한 삶을 추구하잖아요. 그러다가 여유가 나면 누군가를 도와줄 생각을 하는데, 돕는 일에 최우선을 두는 삶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궁핍이, 결핍이, 사실은 은혜예요. 탈북민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여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경제적으로 힘이 든 사람도 많고,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 분들이 더 열심히 사역하세요. 본인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봐야 삶의 본질을 보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구요.
Q 탈북민 사역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막상 시작하기에는 두려운 마음도 있어요. 나쁜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그래서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역에 참여하라고 이야기하고, 사역이 주는 축복도 이야기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마지막에 꼭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사역 시작하고 6개월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해요. 만나서 밥 먹으려고도 하지 말고, 뭘 해주려고도 하지 말라고요. 그냥 지켜보고 참석하기만 하라구요.
항상 사고는 내가 무언가 하려고 할 때 터지는 거거든요. 성급한 마음에 밥도 사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그러다 고맙다는 소리 못들으면 상처받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6개월이나 1년 동안 지켜보고 나면 내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기 시작하고 내가 섬겨야 될 애들이 보여요. 내 입장이나 형편에서 만나야 할 아이들이 보이는 거에요.
그렇게 1년 정도 같이 지내다 보면 아이들이 절대 힘들게 안한다는 걸 알게 되요. 오히려 남한 사람이 아이들을 힘들게 하죠. 그러나 혹시라도 애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 연락을 하라고 해요.
Q 앞으로 하고 싶은 사역이 더 있으신가요?
처음에 이야기했는데 탈북민 중에 왜 여성이 70%가 넘는다고 생각하세요? 여성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더 많기 때문이에요 한 가족이 먹고 살려면 중국에서 음식을 얻어 와야 버틸 수 있어요. 집에 남자가 없으면 배급이 안나오기 때문에 주로 여자들이 음식을 얻으러 중국에 가요. 여자들은 자기 몸을 팔아서라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해요.
그러다 한국에 와서는 할 일이 없어서, 먹고 살 수 없어서 다시 윤락가로 빠지는 여성들이 많아요. 그 여성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사역을 하고 싶어요. 그곳에서 빼내와서 직업 교육을 시켜서 한국에서 잘 정착해서 살 수 있게요. 그런데 간혹 보면 북한 여성을 두고 성적인 문제 때문에 안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너 중국에서 그렇게 살았으니 여기서도 그렇게 사는 거야 하면서요. 그런데 내 가족이 굶어 죽어가는 데, 내 딸이 굶어 죽어가는데 과연 자기 몸을 지킬 여자가 있을까요?
도덕적인 잣대가 아니라 사랑. 사랑만이 이 친구들을 위로할 수 있고 새 길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교회에서 이 사역을 함께 해준다면 좋겠지만 저는 내년부터 시작하려구요. 저부터 시작하면 언젠가 같이 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