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했다. 여태 풀지 못한 짐들은 마감을 앞두고 원고를 매만지고 있는 지금도 책상 주변을 가득 에워싸고 있다. 몇가지 살림살이를 제외하곤 ‘대체 이 많은 물건들을 왜 갖고 있었을까’ 때늦은 푸념을 늘어놓는다. 개중에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것들까지 새 집에 쫓아와 미처 제자리를 못 찾고 여러 다른 짐들과 뒤섞여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소설로 알려진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은 멸망의 도시를 떠나 천신만고 끝에 하늘의 도시에 이르는 주인공 크리스천(Christian)의 험난한 여정을 다룬다. 여정의 시작부터 손에 한 권의 성서와 어깨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나타난 크리스천은 수많은 유혹과 고난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를 향한 도움의 손길과 깨달음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넘긴 그는 마침내 어깨의 짐을 내려놓으면서 그토록 바라던 하늘의 도시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크리스천도 내심 마음의 결단을 굳히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한 셈인데, 쉽게 단념하지 못한 어깨의 짐 때문에 그가 치뤄야만 했던 마음고생이 왠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에티오피아의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랄리벨라(Lalibela). ‘제2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기독교 성지인 이곳에서 시작한 첫 아프리카 촬영 계획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어렵게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문제는 다름 아닌 그곳에 가져간 나의 짐 때문이었다. 현지 기후에 걸맞지 않은 옷가지를 입고 더위를 먹었고,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 다니는 촬영장비의 무게에 고단하게 취재현장을 떠돌았던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다.
결국 그 무거운 장비를 내려놓고 35mm 단렌즈를 물린 카메라만 들고 거리에 나선 오후, 무게가 족히 20kg은 되어 보이는 물통을 반나절을 걸어서 집으로 지고 옮기던 한 아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나이가 기껏해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딸과 비슷한 또래였다. 계속된 가뭄에 메마른 땅이 되어버린 랄리벨라에선 이처럼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 어른들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가벼워질 기색이 보이지 않는 고된 삶의 무게를 꿋꿋이 짊어지고 오늘을 견디고 있을 이곳의 아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사를 하고 나서도 ‘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달리, 여전히 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짐에 뒤섞인 채 가물가물 기억도 나지않는 물건들은 사실 근심 걱정에 찌든 어제의 흔적들인데, 새 집엔 이것들이 어울릴 만한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야 깨닫고 있기에, 이사와 더불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삶의 무게중심을 옮겨보고자 한다. 채움이 아닌 비움의 삶으로…
촬영장소: 에티오피아. 인구의 85%가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반면 기후변화에 취약한 국가적 대처환경과 만성적인 물부족 현상으로 농업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빈곤, 소외 계층의 삶은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으며, www.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