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앞둔 어느 봄날 도쿄의 진구 야구장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던 중 문득 ‘나도 소설이란 걸 쓸 수 있겠다’라는 결심을 굳혔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5년 전 어느 여름날 서울의 잠실 야구장을 찾은 나에게도 무언가 뚜렷한 결심이 서는 순간이 찾아올까 기대했지만 그런 기적 같은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하루키도 그의 작품에 소재로 삼고 싶어 탐낼 만한 두 사람을 그날 잠실 야구장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번갈아 그들을 눈여겨 보았다. 무더운 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토요일 저녁 관람석을 가득 메운 야구팬들의 태도와는 어딘가 결이 다르게 느껴졌던 두 사람, 내겐 그들이 명문 야구팀들의 경기보다 흥미로웠다.
불과 3회에 접어든 경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야구장의 열띤 응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한 남성이 사진의 모서리를 장식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인기리에 팔리던 치맥의 맛에 취한 수천 명의 야구팬들 사이에서 그는 홀로 잠에 취해 있었다. 저녁이 깊어질수록 승부를 다투는 선수들의 치열한 접전이 이곳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야구장 담장 너머 고단한 세상과의 씨름에 삶의 일부를 잃은 영혼처럼 쉽게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입을 맞춘듯 울려 퍼지는 야구팬들의 응원소리가 그의 귓가엔 합창단이 부르는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렸던 것일까.
나의 옆자리에선 머리가 희끗한 한 노신사가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실은 전직 총리이자 학자인 그가 야구장에서 경기를 바라보는 자세는 일종의 신앙의 경지에 이른 성인 같았다. 치맥을 한 상 차려놓고 경기를 즐기던 여느 야구팬들과 달리 홀로 묵묵히 경기를 직관하던 그의 앞에 놓인 건 하얀 종이컵 하나가 전부였다. 말끔한 스포츠자켓 차림에 이따금 종이컵에 담긴 물로 목을 축이는 정도가 주말 저녁 야구장을 찾은 이 노신사가 여가를 보내는 모습이었다. 뒤늦게 그가 자타가 인정하는 ‘야구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우리나라 야구의 미래를 책임지는 한 스포츠 기관의 수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리 놀랍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야구장을 찾은 수많은 이들처럼 이 두 사람한테도 그곳은 삶의 소중한 일부, 또는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꿀같은 잠에 취해있었든, 치맥의 유혹에 빠져있었든, 짜릿한 승부에 홀려있었든, 그동안 누군가의 일상에 밀도를 더했던 낭만의 시간들이 이젠 우리 곁을 떠나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노신사의 옆자리에서 나의 카메라에 담았던 그날의 추억을 정갈한 액자로 옮겨 벽에 걸었다.
촬영장소: 서울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으며, www.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