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선 이렇게 인터뷰 수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교사님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네 반갑습니다. 저는 아이티에서 사역하고 있는 핼렌 김 (김혜련) 선교사입니다.
관운을 타고 태어난 여자아이
Q. 선교사로 헌신하시기 전에 정치계에 계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길로 들어서게 되신건가요?
저희 아버지가 가톨릭이셨는데도 주역을 곧잘 보셔서 제가 태어나자마자 사주팔자를 봤는데 관운이 좋다고 나온 거에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저를 정치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 먹으셨어요. 제가 3남 1녀 중 막내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정치 수업을 시키셨어요 당시에는 남녀차별이 극심했던 때라 흔하지 않은 일이었지요.
저희 아버지는 전라도 전주 출신이셨는데 주변 친구분들이 국가보안법에 위배되어 감방에 가시고 후에는 국회의원이 될 정도로 성공한 분도 계셨어요. 친구분들이 고향에 오시면 저희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라 딸인 저를 그 자리에 데려 가셨어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 이야기를 다 들었죠. 그 뿐 아니라 평소에도 정치인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가르치셨어요. 전략적 마인드, 세상을 큰 판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저희 아버지가 정보 계통 고위직에 계셔서 본인까지 보시고 폐기해야 하는 자료들을 저에게 보여주시고 본인에게 내용을 분석해서 말해보라고 시키셨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께 신문을 가져다 드리곤 했는데 그 당시 조선일보 칼럼을 읽고 제 의견을 이야기 해보라고 하셨어요. 초등학생부터 정치인으로 트레이닝을 시키셔서 결국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들어가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음대를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의지로 정외과에 가게 된 거에요.
Q. 정치계에서는 어떤 일을 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정치학 석사 과정하면서 국회의회발전연구원이라는 곳에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정몽준 의원을 만나고 그 당시 정주영 회장님이 만드셨던 통일국민당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당시 제가 최초의 최연소 여성 정책 전문위원이었어요. 제 나이가 한국 나이로 27살이었는데 우리나라 정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아버지의 자랑이었고, 학교의 자랑이었어요. (웃음) 정외과를 졸업해도 정치계에 진출하는 여학생들이 희소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통일국민당이 해산한 후에는 여성경제인협회로 옮겼는데 1년 예산이 1억, 회원 수 70명, 지부가 네 곳 밖에 안되는 작은 단체였어요. 제가 29살 나이로 사무국장으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3년/ 3년/ 6년 계획을 발표했을 때 처음에는 모두 비웃었어요. 그 때 전국에 경제단체가 5개 단체 밖에 없었는데 6개를 만든다고 하니 어이없어 한 거죠. 하지만 6년동안 실제로 단체를 만들고 법률을 만들었고요. 저는 제가 여성으로 사는 게 힘들어서 그걸 개선하고자 했어요.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에 질렸고, 정치권 성추행에 질렸다고 할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마지막 선택은 늘 남자였어요. 저 나름대로는 당 안에서 촉망받는 인재였는데… 그래도 제가 만든 법률(여성기업지원에 관한 법률)로 인해 5% 밖에 안되었던 여성경제인들이 46%까지 늘어났어요. 그 법률로 인해 남자들이 집에서 살림하던 아내들을 사장으로 앉히고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실질적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이 법률을 만들 때 ‘이 땅의 딸들에게 바친다’ 라고 했어요. 제 뜻은 아니었지만 정치계에 몸담게 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정치가 정말 중요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인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영향력으로 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60년만에 이룬 우리나라의 경제 부흥과 60년 넘게 무너져 내린 아이티가 대조가 되면서 한 나라가 좋은 정치인을 갖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많이 생각이 돼요. 물론 저 같은 경우는 정치하면서 배운 모든 지식들을 하나님 나라 일에 쓰게 되어서 그것이 참 놀라워요.
가정생활의 아픔을 달래려 오른 유학길
Q. 정치를 하다가 어떻게 캐나다, 그리고 UN까지 입성하게 되셨나요?
저는 기본적으로 영어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라 처음에는 캐나다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사실 저는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개인사에는 실패한 사람이에요. 친정엄마의 주선으로 만난 사람과 결혼했는데 저와 잘 맞지 않았어요.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마음의 아픔이 있었지요.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 중에 제가 친권을 잃었어요. 아이들을 못 보니 견딜 수가 없었는데 스스로 자괴감에 많이 시달렸어요. 그렇게 여성인권을 위해 힘썼지만 제 개인사에서는 철저히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해외유학 결심을 하고 준비를 하는데 처음에는 미국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혼녀라는 이유로 비자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유일하게 받아주는 곳이 캐나다였고, 그래서 몬트리올 맥길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37살의 나이에 영어와 불어를 함께 배우기 시작했는데 정말 쉽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공적인 자리에서 섬기는 걸 즐겨했던 사람이라 그 생활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미친척하고 UN에 원서를 냈는데 합격을 해버렸어요. 처음부터 UN에 원서를 넣은 건 아니었고, 유니세프에 원서를 넣었을 때 합격이 되길래 용기를 얻어서 넣은 거였어요. 그 때 저는 카톨릭이어서 유엔에 들어가기 전에 매일 세 시간씩 2년을 기도했어요. 들어가서 보니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들어왔더라고요. UN은 국제기구여서 국제기구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경험도 없이 부서장급으로 채용이 된 거에요. 나중에 알았어요. 아이티로 부르려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던걸요.
Q. UN에서 아이티를 가시게 되신 건데, 지진 이후에 발령이 나신 건가요?
그건 아니예요. UN에 들어가기 전 기도를 하고 있을 당시 1월에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났어요. 캐나다에서 CNN을 보고 있는데 죽은 사람들이 실려 나가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어요. 그 순간 제가 하나님께 말씀드렸어요. ‘I am ready!’ 준비되었으니 보내달라는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신기하게도 그 이후 UN을 통해 3월에 아이티로 가라는 부름을 받았어요. 아이티에 지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 기도대로 아이티에 오게 된 거죠. 그래서 기도를 잘하셔야 합니다. (웃음)
Q. 처음 아이티에 가셨을 때 상황이 어땠나요?
지진 직후여서 정말 혼란스러웠어요. 지위가 좀 높았었기 때문에 UN에서 차량이 제공되었는데 그 차를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지표가 있어야 이동을 하는데 길이나 건물 모든 게 무너져서 차를 어디로 몰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제가 그런 아이티 땅에 가서 정말 열심히 그리고 신나게(?) 일을 했다는 사실이에요. 돌이켜보면 한국에 있을 때 정치판에서도 온갖 스트레스 받을 상황이 많았어요. 모든 사람들이 패닉하고 있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할지가 먼저 보였거든요.
사진 출처: UN Photo/Logan Abassi United Nations
아이티에 왔을 때 불안과 공포가 가득했지만 저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다녔어요. 그러다가 한국인 선교사님들을 만난 게 제 인생의 정말 큰 터닝포인트였어요. 당시에 한국인 교회가 아이티에 없었는데 선교사님들과 제가 창립멤버로 교회를 세웠어요. 그 분들하고 예배를 드리다가 제가 1년 계약이 끝나서 미국 맨하튼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되었을 때 세례를 받았어요. 저는 카톨릭이어서 기독교인 되는 것을 거부했었는데 결국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님이 제 안에 오신 것 같아요. 그렇게 기독교인이 되고는 제가 어느 순간부터 맨하튼에서 전도를 하고 있더라고요.
Q. UN에 들어가기 전 2년 동안 기도했다고 하셨는데, 그 때는 하나님과 만난 건 아니었을까요?
제 안에 온전한 믿음이 세워진 건 아니었던 것 같고, 제가 너무 제 열심으로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 같아요. 사실 그 이후에 주님이 마음에 ‘내가 너의 7년을 받았다’는 말씀을 주셨어요. 제가 퀘벡에 7년을 있었거든요. 제가 교만하게도 2000년에 하나님과 내기를 한 게 있었는데, 주님이 저를 인도해주시면 제가 제 삶을 드리겠다고 한 서약이었어요. 그 땐 삶이 너무 곤고했고, 제가 드린 기도의 의미도 다 알지 못했어요. 10년이 지나서야 제가 저를 드리겠다는 그 서원을 받으신 걸 깨닫게 하신 거죠. 지금 제가 정말 확신하는 건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자녀 삼으신 사람은 언젠가는 다시 그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거에요.
아이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Q. 세례를 받으시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건가요?
네 맞아요. 6개월 간 미국에서 지냈는데 얼토당토않은 사건으로 제가 다시 아이티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사실 UN 안에 저와 아셈회의를 같이 진행한 직원들도 여럿 있었고 제가 재계약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분들도 있었어요.
UN과 3년 재계약 하기를 기다리면서 겨울이 다가왔어요. 그래서 제 겨울옷을 가지러 캐나다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차를 몰고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다시 건너오는 데 제가 실수로 이민자 라인에 선 거예요. 그런 경우에는 차를 돌려서 다른 라인으로 가라고 하는데 직원이 초보자여서 제게 빨간 딱지를 붙였던 거예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넘으려고 이동했는데 빨간 딱지 붙은 사람이 하루에 두 번 국경을 넘으려고 했다는 이유로 저를 체포했어요. UN직원이라고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이 없었죠. 새벽 3시에 저를 캐나다 국경으로 추방했고, 9시가 되어서 UN본부에 이 사실을 알렸을 때 UN이 발칵 뒤집혔어요. UN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요. (웃음)
UN에서 어떤 공문을 보내도 소용이 없어서 3주간 기다렸는데 갑자기 교회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 때 불어로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말씀이 너무나 잘 들렸어요. ‘너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순종하라!’ 그 말씀을 듣는데 제가 아이티에서 세례를 받을 때 들은 예언이 떠올랐어요. ‘너 아이티에 남아. 아이티에 남아서 고아와 과부를 돌봐.’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재미있는 건 그 기도를 해주신 분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UN에 가는 건 나의 뜻이 아닌데 네가 너무 기도하니까 내가 들어준거야’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정말 놀랐던 게 그렇게 기도한 건 저와 하나님밖에 모르는 사실이거든요. 그 때는 ‘기독교에 쓸만한 점쟁이들도 있네’ 라고 생각했는데 캐나다에서 말씀을 들을 때 그 예언이 다시 생각나더라고요. 처음에는 정말 당황했는데 다시 하나님께 여쭈어봤어요. ‘이거 부르심이에요?’ 생각해보면 그 때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바로 가겠다고 순종했으니까요.
순종한 다음 날 미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실수했다고, 미안하다고 말이죠. 사실 미국 대사관은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해도 절대 사과하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더 확실히 알았어요. ‘이거 하나님이 계획하신 거구나.’ 21일 만에 미국에 돌아와 UN에 사표를 제출하니까 모두가 황당해했어요. 그만두고 아이티 간다고 하니까 제대로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너 아이티에 가면 Nobody가 될거야’라고 어떤 직원이 말했어요. 근데 제가 오히려 ‘너 예수님 모르지? 그럼 네가 Nobody야’ 라고 말했어요.
Q. 아이티에 돌아와서 어떤 사역을 시작하셨나요?
아이티에 돌아왔을 때 제 처지가 한심했어요. UN직원일 때는 제가 선교사님께 밥도 사드리고, UN차 이용해서 이것저것 사다 드렸었거든요. 그래서 아이티에 돌아왔을 때 저를 보고 기뻐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너무나 냉랭한 반응을 겪고 제가 제 부르심을 의심할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함께 사역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는데..
그러다 제가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일을 하러 아이티에서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넘어갔어요. 한국 회사에서 일하는데 남자들이 모여서 술, 담배하고 미성년자들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시골에서 100불에 어린 여자아이를 사와서 이용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 제가 여기 왜 있나요? 전 평생 여성들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라고 여쭈어봤을 때 제가 제 부르심을 의심한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때 제가 주님께 다시 말씀드렸어요. ‘주님 제가 죽을 때까지 주님의 부르심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짐 싸서 첫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넘어왔어요. 함께 사역할 사람들이 없으니 제가 가진 돈을 털어서 선교단체를 만들었어요. NGO를 직접 만든 후에 아이티로 돌아왔어요. 2012년 1월에 돌아왔고, 4월에 단체 승인이 나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한 건 5월이에요.
근데 정말 힘들었던 건 제가 2018년도에 다니엘기도회 강사로 설 때까지 주변에서 저의 선교사됨에 대한 의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네가 무슨 선교사야? 신학대 나왔어? 목사 안수 받았어? ‘ 이런 말들로 저를 어렵게 했어요. 그래도 감사한 건 제가 아이티에 오기 전에 캐나다 큰빛교회에서 열린 손기철 장로님 집회에서 성령세례를 받고 인간적인 도움은 전혀 없었지만 성령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게 된 겁니다.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을 온전히 믿었어요. 성경을 읽으면 말씀구절이 튀어나오고 기도하면 환상이 보였어요. 그 때 ‘야곱의 사다리’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너는 다만 예배하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예배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많은 기적이 일어났어요. 돈 한 푼 없는데 아이들은 몰려오고 먹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주님께서 먹이기 시작하셨는데 지금도 수백명을 먹이고 있어요. 지금은 시골학교에서 아이들 170명과 선생님들을 먹이고 갱단의 폭력을 피해 이재민이 된 400여 가구를 먹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사역 초기 7년동안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는 훈련을 시키셨을 때 그 당시에는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 시간들이 정말 나의 교만함을 꺾어지게 하고 정결하게 되었던 시간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예수님이 가는 길을 우리가 가는 거에요. 그 때 흘린 눈물이 한 방을 철렁철렁 채울 정도였어요. 영적으로 또 육적으로 많이 곤고했어서 우울증도 오고 체중도 많이 불어났어요. 아이티도 싫고, 아이티 사람들, 선교사님들 너무 싫어서 UN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광야를 지나며’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나의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 이 찬양 들을 때면 얼른 끄라고 할 정도였어요. 자아가 산산히 부서지고 오직 주님만 남게 되는 그 길이 칭찬받는 길이 아니라 멸시 천대 당하는 길이었던 거에요.
광야에서 홀로 만난 하나님
Q. 정말 철저히 광야에 서 있는 시간이었을 거 같아요. 시력도 많이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신가요?
어느 때가 되니까 제 몸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댕기열부터 시작해서 장티푸스, 치킨구니야 라는 희귀한 병도 걸렸고요. 식중독, 안면마비 현상도 나타났어요. 나중에는 녹내장에 실명 선고까지 받고 시력의 10%만 남게 되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느 날 환상으로 저를 인도하시는데 썩은 나무가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그림을 보여주시면서 ‘이게 네 눈이야’ 하시는 거에요. ‘네가 나보다 높아지려고 하면 그 온전치 않은 눈으로 평생 볼 수 있게 해줄거고, 그렇지 않다면 너의 눈이 이 썩은 나무처럼 될거야’ 하셨어요. 그 이후에는 마음에 두려움은 없고 평안해요. 얼마 전 한국에서 소개로 녹내장 전문인 의사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분이 제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요. 그래도 기쁘고 감사하고, 그 계기를 통해 제가 영적으로 많이 회복되었어요. 에스겔서 말씀으로 제 딱딱했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영혼에 대한 긍휼함을 주셨어요. 저는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라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으로 바꿔가기 위해서 특히 강하게 다루신 것 같아요.
Q. 사역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기 전에 아이티라는 나라에 대해 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지금 상황은 어떤지요.
아이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나라에요. 프랑스가 미국 목화밭에 흑인노예를 팔기 위해서 만들었지요. 도망가는 흑인들을 잡아 죽이면서 처음부터 살인과 핍박으로 얼룩졌던 나라예요.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식민지 중에 제일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수익률이 높았어요. 그러다가 독립을 했는데, 전세계에서 흑인들이 독립한 나라라고 해서 경제봉쇄를 해버렸어요. 처음 나라가 세워졌는데 경제적으로 너무 열악했지요. 그 후에 나폴레옹이 아이티를 점령했을 때 혁명주동자를 처단했고, 아이티 사람들에게 ‘너희 다시 노예가 될래? 아니면 땅값을 치를래?’라고 물어본 거에요. 독립을 위해 그 당시 2조가 넘는 땅값을 치르기로 했는데 200년 넘는 기간 동안 매해 프랑스에 그 돈을 갚아 나갔어요.
그 후에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영향으로 어려움에 처하니까 해방신학 사상을 가진 신부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기하라고 총기를 나누어줬어요. 봉기가 실패가 돌아갔지만 그 여파로 사람들이 가진 총기로 서로 죽고 죽이며 납치하는게 이 나라에 만연하게 되었어요. 그게 점점 심해져서 대통령이 살해 당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 거에요. 대통령이 살해당하는 그 이면을 보니 갱들의 세력이 어마어마한거에요. 서울로 예를 들면 광화문부터 2km 반경만 제외하고 전부 갱들에게 장악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납치가 거의 유일한 경제수단이 되어 버렸어요. 지난 6월에 한국 선교사님들이 납치 당했다가 풀려나는 사건이 일어났고, 엊그제도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목사님을 납치해 갔어요. 버스 한 대를 납치하기도 하고.. 지금 현재 상황은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이들도 타 있는 버스에 불을 질러버리는 일도 있고요.
사단 숭배의 영이 이 땅을 잡고 있어요. 교회도 있고, 카톨릭도 있지만 사람들이 부두의 영에 붙들려서 아무런 능력이 없어요.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때 독립하게 되면 이 땅을 사단에게 바치겠다고 서원한 땅이거든요. 언제 이 나라가 아프가니스탄같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고, 저와 아이티 선교사님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있어요. 언제 봉변을 당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아가서 말씀, 얼른 돌아가서 아이티 땅의 다음 세대를 살리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이 추수 때라는 마음이 강하게 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을 받는 게 영광이라는 감동이 있어서 사역을 오히려 계속 확장하고 있어요.
Q. 어떤 사역을 구체적으로 하고 계신지 듣고 싶어요.
제가 UN직원일 때 차를 몰고 나가면 제 곁으로 오는 가난한 어린 아이들이 있었어요. 그 때 제가 그 아이들에게 ‘내가 언젠가 너희들을 위해서 뭔가를 할게’ 라고 말했었는데 정말 말이 씨가 되었어요. 사역 초기에 그런 아이들을 만나게 하셨어요. 그 때 어떤 분이 1000불을 주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학교를 보내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 돈으로는 택도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그림을 보여주시는데, 그대로 하라는 말씀으로 받고 순종했어요. 마당에 책상 몇 개 놓고 밥을 먹이기 시작한 거죠. 페이스북에 후원요청글을 올리면 욕이 한 바닥이었어요. 위험한 애들을 뭐하러 먹이냐고.. 딱 한 사람이 응답해서 그 분이 주시는 쌀로 아이들을 먹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먹이기 시작한 게 벌써 8년이 지나갔고, 제가 키우는 아이들 44명이 전국 성적이 상위권이에요.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고 변도 닦을 줄 몰랐던 아이들이었는데 말이죠. 참 신기한 게 뭐냐면 처음 수업시간에 앉아서 흐리멍텅한 눈으로 교과서를 찢어서 씹어 먹는 거에요. 플라스틱도 씹어 먹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정신병인줄 알았는데 영양 부족이었어요. 영양 부족으로 인해 뇌발달이 느려서 여러 장애들이 함께 와요. 애정결핍보다 무서운 게 영양 결핍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잘 먹이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저희 아이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30명이에요. 먹고 입히고 씻기고, 공부시키는 역할이 다 정리가 되어있어요. 저는 좋은 엄마 역할만 해요. (웃음)
하나님의 여성사역자로 다시 일어나다
Q. 여성 사역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인과 뱀이 서로 원수가 되는데요.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기 전에 이미 여인과 뱀이 원수가 된 거에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의 여성들을 생각해보면 공부도 못하고, 집에서 살림을 해야 하고,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있거든요. 사단은 끊임 없이 여성들을 괴롭히고 있고, 공격하고 있어요. 그래야 고아와 과부가 끊임없이 양산이 되거든요. 여성 사역을 하는 건 사단의 목에 칼을 직접적으로 들이미는 사역이에요. 고아와 과부가 많으면 이 사회가 혼탁해지고 성범죄가 일어나고 깡패들이 생기고, 결국 그들이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구조, 이게 사단의 전략이에요.
이런 내용을 알기 때문에 처음에 여성 사역을 하기 꺼렸었는데 제가 작년에 코로나에 걸려 죽다가 살아났어요. 거의 죽다 살아났어요. 폐에 염증이 심해서 오른쪽 폐에 손바닥만한 염증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호흡도 어렵고 혈중 산소 농도가 95이하이면 뇌가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86까지 떨어졌었고요. 산소호흡기를 차야 했어요. 그 때 제 안에 있는 견고한 진이 무너지고 정말 죽음 앞에 서는 심정으로 찬양을 드렸어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어요. 찬양하는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회복시켜주셨죠. 그 이후에 여성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아이티가 주님이 주신 저의 사역지, 부르심이라는 걸 이제는 정말 확신합니다.
10대에 임신한 아이들, 어린 여자아이들을 거두게 되었어요. 한 번은 17살짜리 여자아이가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 돈으로 170불이 들더라고요. 아이티에서 그 돈은 어마어마하게 큰 돈인데, 정말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생명이 많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료로 하는 산부인과를 열려고 기도 중에 있어요. 여성센터를 세우는 사역을 준비중인데 한국에서 4개 컨테이너가 오지 못하고 있어요. 코로나 여파로 컨테이너 4개 비용이 1억 달러라고 합니다. 여성 사역이 참 반대가 많은데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셔서 이 생명 살리는 사역을 끝까지 이뤄 가실 줄 믿습니다.
Q. 선교비는 혹시 어떻게 충당하시는지요? 100% 후원으로만 이루어지나요?
처음에는 토론토에 30명 규모인 작은교회에서 후원을 해주시다가 현재는 중단되었거요. 이후에 2018년도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저를 파송해주셨어요. 사실 신학대학교에서 파송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정기후원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는데요. 대부분이 일시적인 후원이라 주님의 인도하심을 매 번 구하게 돼요. 한국에 들어와도 간증을 잘 하지 않는데 어쩜 그렇게 어려운 교회들만 연결이 되는지요. (웃음) 그런데 그 집회에서 어떤 분이 감동을 받으시고 후원을 지금도 하고 계세요.
Q. 사역을 하면서 생각나는 아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사실 너무 많죠. 8년 전에 들어온 아이들 중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7명있는데요. 이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을 때 참 많이 힘들었어요. 집단 가출에 오해에..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건이 정리되었어요. 직원 중에 돈을 훔친 직원이 있었어요. 그 아이를 내보내면 제가 사역 실패를 하는게 아닌가 해서 많이 울었는데, 주님께서 제 속에 숨겨져 있는 저의 의를 드러내시더라고요. 처음에는 데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내보냈어요.
사역을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제가 ‘사역의 왕국’을 만드는 거에요. 아이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초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제 유익을 위해 하지 말라는 말씀이 저에게 주신 소중한 교훈이에요. 정성으로 키운 아이가 저를 배신하고 떠났을 때는 저는 씨 뿌리고 물주는 자구나.. 그런 마음의 깨달음도 주셨지요. 추수를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열매도 주님이 거두셔야 된다고 이제는 온전히 믿어요. 나에게 남아 있지 않아도 주님이 이루실 것들을.. 저도 사역을 하면서 많이 울었지만 그 눈물이 정말 헛되지 않았고 지금은 오히려 많이 울지 않아요. 풍족해서 울지 않는게 아니라 코로나 이후에 하나님께서 또 우리를 놀랍게 쓰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거에요.
Q.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 제목에 대해 나누어주세요.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기술학교에 대한 비전을 품고 있는데, 그 안에 기도의 집을 세우고 싶어요. 24시간 기도하는 집으로요. 아이티 땅에서 처음 하고 싶은 사역이 우물 사역이었는데 메마른 사람들이 와서 성령 한 그릇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세우고 싶었어요. 이번에 기술학교 사역과 함께 그것도 같이 시작하려고 합니다. 기도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디어 컨텐츠와 방송을통해 전세계에 전하고 싶어요. 방송만 봐도 힐링이 일어나고 성령 받는 역사를 기대하면서요. 함께 기도해주시고 동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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