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직장인이었다가 아내의 직장 때문에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 아이 양육. 세상과 소통을 하기 위해 아빠 사진가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자신의 꿈을 향해 새로운 길을 내딛은 사진작가 윤한구씨의 인생 스토리.
Q 사진을 찍으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뉴욕에 살면서 사진가로 활동한지 7년쯤 되었어요. 그전에는 광고 미디어 쪽 일을 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였습니다.
Q 지금 뉴욕에 살고 계시지만, 예전에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유학 자율화가 시작되었던 중3 때 유학을 갔습니다. 사춘기 때여서 가졌던 문제들과 언어적, 문화적 장벽들로 인해 어린 나이에 혼란을 많이 겪었고, 덕분에 방황도 많이 했죠.
대학 진학을 놓고 부모님과의 갈등이 있었어요. 저는 스키부의 주장이 되어서 스키로 대학을 진학하고 싶어했고, 부모님은 안정적인 전공을 선택하기 원하셨어요. 결국 제가 부모님의 반대를 꺾고 스키로 대학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니 경쟁도 치열했고 운동선수로서 가지는 고립과 외로움이 심해서 열정이 많이 식었어요. 내가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까 싶어 후회도 들었어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해병대로 자원 입대를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시도하는 것을 좋아해서 군대도 이왕 가는 것,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에 도전하고 싶어서 해병대를 지원했어요. 스키나 해병대, 모두 제가 가겠다고 해서 들어간 거였는데 사실 들어가서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한국 군대 문화, 특히 해병대 특유의 위계질서, 제가 유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유없는 괴롭힘을 당했어요.
Q 스키 전공에서 해병대까지 나오셨는데 어떻게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셨나요?
고등학교 다닐 때 스키부 로고를 디자인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생각이 나더라구요. 손으로 그리고,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그래서 제대 후 그래픽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꿔 새로운 학교에 편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2년 후에 뉴욕, 파슨스로 편입해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어요.
졸업 후, 미국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때 911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뉴욕은 테러 쇼크로 졸업 후 바로 취업하지 못한 유학생들은 모두 출국하라는 명이 떨어졌고, 저는 원치 않은 귀국을 해야 했습니다.
Q 그래서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시게 된 거네요.
아리랑 TV에서 회사 홍보물을 제작하거나, 포스터, CI 등의 회사 이미지와 브랜딩을 하는 작업을 했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회사 사장님이 점심을 먹자고 하셔서 갑자기 나갔는데, 그때 사장님은 작정하시고 저에게 소개팅을 시켜주려고 하신 것이였어요. 점심도 사주시고, 거짓말도 약간 보태셔서 저희가 연결된 것이죠. (윤한구씨의 아내는 B&R 매거진 1호에 실린 UNICEF에서 일하는 김새려 씨이다.)
Q 그러다가 사진작가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사진을 직업으로 삼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어요. 아내가 저랑 결혼 할 당시에 유니세프 (UNICEF)를 휴직한 상태였어요. 휴직 기간이 끝나고 다시 복직을 할지, 포기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아내에게 유니세프라는 직장은 분명한 소명과 부르심이 있는 곳인데, 결혼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유니세프의 특성상 미개발 나라나 지역을 가야하는데 과연 그런 곳에서 내가 할 일이 있을까 싶어 고민하던 차에 아내의 근무지가 뉴욕으로 확정되었고, 저도 뉴욕의 본사로 이직하는 길이 열려서 고민없이 뉴욕행을 택하게 되었어요.
유학생 때 911 테러로 돌아와야 했던 설움을 딛고 이제 나도 당당한 뉴요커로서 새출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설렘과 기대로 가득한 시간이었어요. 인사 담당자도 만나고, 뉴욕에서의 복직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차에 금융 위기가 찾아왔어요. 대부분의 기업이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채용 관련된 모든 일이 정지되었어요.
Q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정말 당황하셨을 거 같은데요.
몇 달 동안 100군데 넘게 이력서를 넣었는데, 겨우 한 두군데 정도만 연락이 왔어요. 제가 미국에 간 이후 몇 년 동안 채용이 올 스톱된 상태였지요.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가장으로서 구직 활동이 1년 넘게 길어지다 보니 감정기복도 심해지고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잡겠더라구요. 요식업에서 아동복 쇼핑몰까지.. 다양한 업종을 생각했는데 그때마다 아내와 트러블이 생기고 그것은 큰 싸움으로 이어지기 십상이었어요.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는데 왜 사람들은 몰라줄까. 꼭 거창하지 않더라도 시작을 해보고 싶은데 안되니까 속이 타고, 그런 상황에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딸, 채영이를 데리고 나가서 사진을 찍어주는 일이었어요. 채영이 어떻게 지내는지 부모님이 보실 수 있도록 SNS에 업데이트 하는 거죠. 그러다 결국에는 채영이를 돌보는 일과 우리가 미국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를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알리려다가 다시 제 손에 카메라가 잡힌 것 같아요. 그 때는 그냥 할 수 있는 게 그거 밖에 없기도 했구요.
Q 사실 남자들이 사회적 활동에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는 당사자여서 힘들었고, 채영이 엄마는 아내로서 그 파편을 많이 맞았어요. 채영이가 어리긴 했지만 아빠 엄마가 다투고 갈등하는 부분들을 봤죠. 제가 정말 힘들었을 때 채영이 엄마까지 ‘당신 직장 언제 구할거야?’라고 했다면 2배, 3배로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채영이 엄마 회사 일이 잘되면 솔직히 불편한 마음도 있었어요. ‘나 때문에 당신이 와서 뉴욕에서 일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동의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못했겠지’라는 말도 하고. 하지만 채영이 엄마에게 너무 감사한 것은 제 스스로 분노하고 화가 나 있을 때 옆에서 차분하게 지켜봐주었던 것이예요. 아직 100% 힐링이 된 건 아니예요. 사진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아직 가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경제 활동을 제대로 하질 못하고 있으니까요.
Q 어떻게 보면 사진은 해야겠다 싶어 한거라기보다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라는 말이 맞겠네요.
그 때는 제가 밖에서 사회생활을 안 하는게 부끄러운 일 같고, 남보다 뒤쳐지는 것 같았어요. 채영이를 낳았을 때 장모님이 우스개 소리로, 드라마 보면 남편들이 애들 돌보는 경우 많다면서 ‘윤서방도 채영이 육아일기 좀 써 봐, 드라마에서 남편들이 그런 거 하대.’ 하셨거든요. 그 당시에는 기분이 안 좋았었어요. 나는 사회 생활을 하는데, 육아일기는 엄마들이나 쓰는 거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제가 사진으로 아이의 성장과정을 다 기록을 하고 있더라구요. ‘아, 말은 씨가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래서 요즘에는 장모님이 무슨 말씀하시면 일부러 안 들어요.(웃음)
Q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드셨나요?
돌아갈 수가 없었던 이유가 제가 군대에서 겪었던 일이랑 비슷해요. 해병대는 자원입대이기 때문에 훈련소 입소 일주일 후에 집에 가고 싶은 애들은 보내줘요. 많이 때리고 내보냈는데 일단은 나가는 사람들은 맞더라도 편한 데 갈거라는 심정으로 나가거든요. 한 200명 중에 30명 정도가 퇴소를 했어요. 그 사람들이 나가면서 ‘같이 나가자’ 하면 나도 나갈까 싶다가도 이미 친구들에게 얘기는 다 하고 왔잖아요. (웃음) 중간에 집에 가버리면 친구들이 뭐라 할까 싶어 못 돌아갔어요.
뉴욕도 그래요. 친구들에게 뉴욕에 일하러 간다고 말했는데 다시 돌아간다는게 자존심 상하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더 답답한 거에요. 그때 채영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게 제게는 소통의 창구였어요. 아이가 처한 엉뚱한 상황, 아이의 습성을 발견하게 되는 찰나의 사진들을 찍어서 올리고 또 그런 상황을 공감하는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힘들었던 시간들을 조금씩 넘기게 된 거 같아요.
Q 한구씨 사진을 보면 주로 저개발국에 가서 찍은 것이 많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9년도에 아이티에서 지진이 났었어요. 뉴욕에서 아이티까지 비행기로 5~6시간 정도로 가깝거든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아이티 지진을 실시간으로 심각하게 보도했었어요. 지진으로 부모가 갑자기 죽고 고아가 된 아이들, 아이가 지진 더미에 깔려서 울고 있는 부모들을 보면서, 만약에 저 아이들 중에 채영이가 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라는 생각이 들게 되더라구요. 사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아이를 돌보면서 자녀가 얼마나 귀한지를 느끼게 되었거든요.
갑자기 현장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가려고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길이 열리지 않고 상황도 꼬여서 못가고 있다가 몇 개월 후에 제가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아이티에 아웃리치 팀을 보낸다는 광고가 떴어요. 그래서 아이티를 가게 됐죠. 지진이 난지 반년이 지났지만 현지의 상황은 지진이 난 때와 다를 바가 없었어요. 가서 우리가 했던 활동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현지 아이들의 사진도 찍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정말 내가 가야할 길이 이 길이라는 확신이 섰어요. 그 다음에 고민없이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를 갔던 게 그때 아이티에서 받았던 확신 때문이었어요.
Q 아이티를 다녀온 이후에 저개발국가에 가고 싶었던 이유가 뭔가요?
힘들다고 하지만 나는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평온하게 아이를 볼 수 있는데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많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낙후된 지역에서 많은 기록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작업들이 아직 관심을 받고 있지 못한 것 같더라구요. 카메라 보급률은 제일 가는 나라인데, 그 시선이 너무 한국 사회 안에서만 머무는게 아닌가 싶었어요.
만약 제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사진가보다는 그냥 회사원이었겠지만, 원했든 아니든 뉴욕에 오게 되었고, 여기서 아이티 지진을 화면으로 보면서 아빠의 마음으로 아프리카라든지 중앙아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던 거 같아요.
Q 뉴욕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 시선이 독특한 것들이 있던데요?
제가 뉴욕에서 보는 것은 스스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 엉뚱한 풍경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뉴욕패션 위크 기간에 엄청 멋을 내고 15센티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있었어요. 하이힐을 신었으니까 신발 아래쪽이 보이잖아요. 거기에 이만한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거에요.(웃음) 사람들이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흠이 다 보이는 거잖아요.
어떤 사람은 멋있게 차려입고 와서 자신을 찍으라고 포즈를 취하는데, 찍으려고 보니 지퍼가 내려가 있는 거에요. (웃음)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자기만 몰라요.
하나님은 지퍼를 연 사람이건, 택은 안 뗀 사람이건 간에 존재 자체를 예쁘게 보시잖아요. 마치 아빠가 아이를 보듯이요. 예전에는 무거운 마음으로 가난한 나라에 가서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어요.
Q 앞으로는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은지?
처음에 저개발국가들을 가면서 편견이 있었어요. 저 나라에는 이런 문제들이 있으니까 이런 걸 다뤄야지 그런거요. 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손길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질병이라든지 아이들의 노동 환경이라든지 그런 부적절한 부분들을 기록하는데 집중을 했었는데 자칫 제가 하는 작업이 그런 한 부분만 보여줌으로 인해서 그 나라의 아름다운 부분들이 왜곡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나라에 가야만 찍을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사진가는 아닌 거 같아요. 자기 본연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주변에서부터 관찰하고 발견하고 일상적인 부분들에서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소재들을 찾아내고 그걸로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공을 키우는 일인 거 같아요.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안에서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내가 왜 아이티를 갔는지, 내가 왜 뉴욕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는지, 그 동기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거죠. 다른 나라이든 뉴욕이든 있는 자리에서 의미있는 사진들을 찍고 싶어요.
*편집자 주
현재 윤한구씨는 작년 말 뉴욕을 떠나 2016년부터 가족들과 북경에서 제 3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