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가끔 아이티에서 찍은 지진 피해 복구 현장의 사진들을 본 지인들은 내게 그곳에 다녀온 까닭을 묻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이티에 갔던건 지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에 뉴욕의 한 비영리 재단을 통해 구한 사진책에서100년 전 한국 땅을 밟은 초창기 외국인 선교사들의 눈으로 본 당시 한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에 실린 한 흑백사진에서 훗날 아이티를 가게 된 어떤 실마리를 찾았던 거 같다.
1924년 평안북도 피현면에 세워진 천주교 학교의 교정에서 촬영된 그 빛바랜 사진엔 수백 명의 꼬마 학생들이 앞으로 나란히 양 팔을 뻗어 열을 맞추고 있다. 아이들의 차림새를 살펴보니 나름 구색을 갖추려고 했지만 당시 이들의 집안형편이 얼마나 궁색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쳤을 외국인 신부와 수녀들도 보인다. 푸른 눈을 가진 이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낯선 시선과 호기심 어린 눈빛이 사진에 긴장감을 더한다. 한국인인 나에게조차 여지껏 생소한 이 지명을 푸른 눈의 외국인 선교사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던 것일까.
포르토프랭스 공항에 착륙한 나와 일행은 지진의 충격으로 공항이 제기능을 상실한 탓에 활주로 옆 격납고에 임시로 마련된 출입국사무소에서 수많은 국제구호단체들과 섞여 혼란스러운 입국 절차를 밟았다. 입국 절차가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것은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외지인들과 이들이 뻗은 나눔의 손길이 아이티 사람들에겐 무척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오랜 세월 가난과 절망의 그늘에 가렸던 그들의 삶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면서 비친 이 나라의 당혹스러운 표정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현지에 있는 동안 이런 낯설고 어색한 만남들은 계속 이어졌다. 나와 일행이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를 따라다녔다. 100년 전 현대 문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온 외국인 선교사들을 향했던 우리의 그 눈빛처럼,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살아가는 그들도 우리의 나눔을 주목하고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지인들이 그 까닭을 물을 때, 여전히 답을 찾고 있는 나는 이따금 일본인 사진가인 나가이 겐지가 평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떠올린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일수록 누군가는 꼭 가야 하지 않겠는가.”
2007년 미얀마 군정의 무차별 발포 현장을 취재하던 중 진압군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현장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이가 바로 그였다.
촬영장소: 아이티공화국. 카리브해 중앙에 위치하며, 15세기 말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서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동원된 흑인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노예로 팔려 신대륙에 옮겨졌다. 2010년 관측사상 최고 강도(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으로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의 대부분이 초토화되었다. 이후 지속되는 경제난으로 국가 재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티의 현재 1인당 GDP는 100년 전 대한제국 당시와 비슷한 수준으로 추정된다.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작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 현재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으며, www.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