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통역사로 청각장애인에게 사랑을 전하는 수어통역사 김금재 권사님을 만나 그녀의 삶에 드러나 비앤알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Q. 본인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선한목자교회에서 설교 수어통역을 하고 있는 수어통역사 김금재라고 합니다.
친구 따라 간 CCC 공연에서 예수님을 만나다
Q.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 따라 동네교회를 가끔 간 적은 있었지만 믿음은 없었어요. 집안에 믿는 사람이 없었고 무속신앙을 믿는 분위기여서 지속적으로 교회 출석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처음 받아들인 건 대학생 때로 기억이 나요. 대학 때 집을 떠나 자취를 했었는데 대학 친구가 초대해 준 CCC공연을 보고 처음으로 나를 향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믿어졌어요. 공연 중에 ‘네가 나를 또 못박는 구나’ 라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순간 제가 주님을 못박는 장본인이구나 깨달아졌어요. 주변 사람 아무도 울지 않았는데 저 혼자 펑펑 울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Q. 그럼 이후에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저를 CCC공연에 데리고 가준 친구와 학교 근처 작은 교회 수요예배를 갔었는데 주일 예배를 계속 참석하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러다가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는 더 교회 갈 일이 없어졌지요. 한 동안 사회생활, 인간관계에 집중된 삶을 살았어요. 그런 삶을 살았는데도 그 당시 직장인 수어통역센터에서 만난 분을 통해 ‘금재야, 너는 다 좋은데 예수님만 딱 믿으면 너무 좋겠다’ 라고 하시더라구요.
Q. 수어통역센터는 어떤 곳인가요? 졸업 후 바로 일하시게 된 건가요?
네 맞아요. 결혼하기 전까지 4년간 농아인협회에서 운영하는 수어통역센터에서 일하게 되었고요. 말 그대로 수어통역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에요. 제가 대학 때 수어통역으로 봉사활동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곳에서 일하게 된 것 같아요. 이 때는 일반 통역을 했었어요. 그 때가 2000년 정도였고, 수어통역센터가 시작된 게 90년대 중반이니까 체계적인 수어통역 초창기라고 볼 수 있어요.
봉사동아리로 시작한 수어
Q. 아 그렇군요. 그럼 수어는 언제부터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대학교 때 처음 배우게 되었어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수어라는 것이 농인들의 ‘언어’로 인식 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80년대부터 서서히 관심도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수어 붐이 일기 시작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대학교 때 수어를 처음 접했고 동아리 생활이 정말 재밌고 즐거웠어요. 수어 배우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방학 마다 섬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봉사활동도 떠나곤 했었어요. 동아리 회장까지 맡게 되고 제 대학생활은 동아리 외에는 사실 특별히 기억나는 게 없을 정도에요.봉사활동을 많이 하다보니 실력도 쌓이고 나중에는 동아리 내에서 기초반 교육도 담당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인덕대에도 강사로 출강하고 있어요..
Q. 이야기를 듣다보니 ‘수어’는 ‘수화’랑은 다른 것인가요? 저희는 보통 수화라고 불렀던 거 같은데요.
맞아요. 예전에는 수화라고 했어요. 하지만 2014년도에 한국수화언어법. 줄여서 한국수어법이 제정이 되면서 수어는 농인(청각장애인)이 손의 움직임이나 표정 등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농인들의 공용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있는 하나의 엄연한 언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수어라고 부르게 된것입니다.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우리에게 한국어가 모국어인 것처럼 농인에게는 수어가 제1언어이고 모국어인 것이지요.
Q. 듣다보니 진로가 자연히 수어통역으로 이어졌을 것 같은데요.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특수교사에 대한 마음이 있었어요. 친오빠가 연약함이 있었다 보니 유달리 마음이나 몸이 아픈 사람들을 향한 긍휼함이 많았어요. 제 바람과 달리 특수교사와 전혀 연관이 없는 학과(금융보험학과)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대신에 대학 때 수어 동아리에 발을 내딛게 되었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참 실수가 없으신 게 제가 수어통역센터에서 일할 때 전체직원이 3명 뿐 이어서 현장 업무와 회계업무를 함께 병행해야 했어요. 그 때 학교에서 배운 전공도 사용 하시더라고요. 제가 센터에 근무할 당시에는 초창기라 예산 수급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시/도 뿐 아니라 군단위까지 센터가 생길 정도로 인프라 면에서 많이 발전했어요.
오해가 만들어 준 평생의 인연
Q. 그럼 교회에서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하기 시작하셨어요?
제가 졸업하기 전 4학년 때 남편을 만나게 되었는데 저희 남편이 저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먼저 시작했어요. 믿음의 1세대인데 결혼할 때 이미 견고한 믿음이었죠. 참고로 남편은 수어동아리 선배인데, 활동을 특별히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회장이다 보니 행사 때 선배님들께 참석해 달라 전화하다 알게 되었죠. 제가 졸업 앞두고 선배 소개로 미혼모 아이들 돌보는 영아원에 두 달 동안 들어가게 되었는데 꼼짝없이 갇혀서 아이만 돌봐야 하니 많이 답답했어요. 안에 있으면서 동아리 선배들하고 메일을 주고 받았는데 제가 ‘선배님들, 사랑합니다.’라고 모든 선배들에게 보냈는데 선배 중 한 명이었던 저희 남편이 ‘선배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글귀로 보고 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를 하게 되었어요. (웃음) 거기서부터 인연이 시작되어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답니다.
남편이 저의 신앙의 선배인데 결혼하면서 마음에 믿음의 가정을 세우고자 하는 비전, 자녀들을 모태신앙으로 키우고자 하는 소원을 품었어요. 저희 부부가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한 게 선한목자교회가 있는 복정동이었는데, 유기성 목사님께서 부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부터 다니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르렀어요. 아마 제가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지 않아서 체계적으로 훈련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등록을 했던 것 같아요. 저도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님 말씀을 들어봤지만 저희 목사님 말씀이 이해가 잘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그 때는 말씀에 대한 기초가 없어서 찬양에 은혜 받던 시절이었는데도 말씀이 쏙쏙 들어왔어요.
Q. 설교통역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수어통역일을 하셨어서 바로 시작하셨을 것 같기도 해요.
선한목자교회에서 2008년에 처음 수어통역을 시작했어요. 그 당시 한 농인 목사님의 요청이 교회로 들어왔다고 해요. 당시 교회에 농인 성도가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담임목사님께서 수어 설교통역을 시작 해야겠다고 결심하셨고 교회 광고를 통해 봉사자 모집을 시작했어요. 공동체 집사님들이 제가 수어통역이 가능하니 지원해보라고 했지만 수어를 5년 가까이 쉬기도 했고, 설교통역이 일반통역과는 쓰는 단어, 개념부터 다르기 때문에 시작할 엄두를 못냈어요. 그렇게 저는 통역 봉사자로 지원하지 않았고 다른 분이 통역을 하게 되셨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한 다리 건너 아는 선생님이시더라고요. 이후에 가끔 만나서 차도 마시곤 했었어요. 매주 그 분이 하시는 설교통역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설교 통역이기 때문에 낯선 것이 많았는데 그분을 통해 저를 준비시키신 것 같아요. 섬기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도 일어났고요. 1년이 지나고 그 선생님께서 선교훈련을 받으러 떠나게 되셨고 저에게 설교통역을 부탁을 하셨어요. 교회에서 집사 직분 받을 때 어떤 파트에서 섬기고 싶은 지 적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수어 달란트로 섬기고 싶다고 적어 냈던 게 그때서야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렇게 2010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섬기고 있습니다.
무명의 장애인 성도가 준 카드 한장
Q. 설교 통역이 단순히 말을 통역하는 게 아닌데 어려움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설교통역과 일반통역이 수어 자체로 보면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이게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마음가짐이나 표정도 중요하게 느껴져요. 주님께서 목사님, 그리고 저를 통해 하실 말씀이 잘 전달되는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거룩한 부담감이 있지요.
설교 통역을 처음 할 때는 목사님 말씀 놓치지 않으려 긴장하며 따라가는 데에 급급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4-5년이 지나면서 설교통역이 익숙해지니 감동없이 기계적으로 통역하는 단계가 되더라구요. 아이 육아에 속장 (*속회: 감리교에서 소그룹을 지칭하여 부르는 말, 속장: 속회 리더)으로 섬기고 통역까지 하면서도 그저 일들만 하는 제 모습에 기쁨도, 감사도 없는 영적 침체기도 겪었어요. 이렇게 통역을 해도 되나.. 이게 아닌데.. 제게 주어진 사명들에 저를 조명하며 좌절감에 빠져 이제 정말 그만 두어야겠다. 나는 자격없다 수없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방송실로 성탄카드가 왔는데 지방의 어느 무명의 성도님(장애성도라고 쓰심) 이 보내주신 카드였어요.
그 카드 글귀를 보는 데 주님이 나를 다 알고 보고 계시구나 깨달아졌어요. ‘괜찮아, 잘하고 있어’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다가왔어요. 카드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혼자하고 있다는 느낌에 외롭고 힘들다 생각할 때가 많고, 또 누가 이 통역을 보고 있을까 의문이 들어서 수어 공부도 소홀히 했었는데 그 카드를 받고 다시금 기운을 내게 되었어요. ‘이 자리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기 싫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날까지 이 자리를 지키자. 나 같은 자를 쓰시는 주님께 기쁨과 감사로 이 자리를 지키겠다.’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육아를 하면서 사역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때마다 교회 내의 좋은 프로그램도 듣게 하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지금도 통역을 실제 하는 주일까지 일주일의 삶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가 의심이 들 때도 있고 흔들릴 때도 많았지만 예배의 자리를 통해 계속 저를 세워 가시는 것이 감사하고 놀라워요. 한 사람의 농인이라도 나의 수어를 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Q. 설교통역을 시작하신 이후에 일반 수어통역도 시작하셨다고요.
설교통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훈련시키셨고 제가 준비 되었을 때 일반통역의 길도 열어 주셨어요. 설교통역을 오래 하다가 일반통역을 다시 하려니 처음에는 두렵더라고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도전할 마음을 허락하셔서 시작했어요. 잘되면 주님 은혜요, 잘 안되면 준비 안한 내 탓하면서 갈 결심을 했지요.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하고 있고, ‘걸어서 세계속으로’ 같은 프로나 MNET 같은 프로그램에서도 통역을 했어요. ‘걸어서 세계속으로’ 같은 경우는 본방에서는 수어통역이 없는데 이후 케이블TV에서 재방송할 때 수어통역을 별도로 삽입을 해서 방영을 하고 있어요. 요새는 농아인들을 위해 화면을 반반으로 분할해서 제작하는 스마트수어방송 프로그램도 있는데 그것도 진행하고 있어요.
사실 처음에 일반 통역을 진행할 때는 걱정되고 염려되는 부분이 많았던 이유가 교회 안에서는 그저 잘했다. 귀하다 칭찬만 듣고, 잘못했다고 뭐라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세상, 일반 방송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이게 일반 방송의 경우에는 케이블 방송에도 여러 번 재방송이 되기도 해서 그만큼 부담감이 많았지요. 그래도 주님께서 담대함 주셔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또 원하는 프로그램과 연결되지 않을 때도 더 준비하라는 뜻이구나. 내게 이 길이 아닌가보다. 주님 뜻이 있겠지..하며 주님 바라보며 겸손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걸어서 세계속으로’ 같은 프로도 처음에는 참 어려웠는데 지금은 코로나 시국에 세계여행 시켜주신다 생각하고 임하니 감사하고 기뻐요. 이 프로를 통해서 여러 다른 프로그램이 연결되어서 또 감사했어요. 생전 해보지도 않은 당구 경기 통역도 하고요. (웃음) 골프 경기도 했고, ‘수요미식회’, 드라마 ‘호텔 델루나’, ‘산후조리원’도 했었네요. 여러 곳으로 다양하게 이끄심이 참 신기해요. 통역하면서 웃기도 많이 웃어요. 또 이번에는 왜 이런 프로그램을 통역하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저를 또 어떤 길로 인도하실까? 기대도 하게 됩니다.
애들이 셋이라서 이동해서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은데 기차타고 이동하거나 할 때 그 시간을 통해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도 읽게 돼요. 육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시는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제가 주일에는 설교통역을 하기 때문에 스케줄이 맞지 않으니 다른 통역사분들에게 일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서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사용해 주시니 감사하지요.
Q. 혹시 대학에서 수어 통역을 전공할 수도 있나요?
전공으로 생겼고요. 3~4개 대학교에 수어통번역이나 수어통역학과 등이 있어서 전문적으로 공부하여 학사나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많은 분들이 수어연구나 농인 관련 다방면으로 연구논문이 나오고 있고, 우리 농인들에게 보다 전문적으로 섬길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열려 있어요. 아마 저도 경력을 계속 이어갔다면 저도 학교에서 가르칠 기회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도 해보지만 지금의 제 모습 또한 주님의 인도하심이고, 제 삶에서 주님 안에서 믿음을 키워가고 믿음의 가정을 이룬 이 길이 최고였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35만여 청각장애인이 있는데 장애 시기나 정도에 따라 의사소통 방법이 수어, 구화, 필담 등이 있습니다. 의료기술이나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10~20대 청각장애인과 30~40대, 50~60대, 70대 이상 청각장애인의 수어 사용 방식의 차이가 있어서 지속적으로 청각장애인들이 요구하는 통역을 위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구화: 입모양을 읽고 음성언어를 사용
청각장애인의 제 1 언어 수어
Q. 수어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우리나라 말의 몇 퍼센트 정도 될까요?
수어도 언어이다 보니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있어서 몇 퍼센트다 확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한글보다 훨씬 더 적은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수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점이 분명히 있지요. 하지만 고정된 수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화 이외의 마임(동작)이나 표정, 속도 등 비수지신호를 통해 거의 대부분 통역이 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 ‘밥 먹었어.’와 ‘밥 먹었어?’ 이런 평서문, 의문문을 구분하는 문법적인 부분도 당연히 다 표현이 됩니다. 일반 언어도 마찬가지이지만 개개인의 말하는 스타일이 다 다르고 수어의 능숙도에 따라 같은 단어도 달리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요. 결국 수어통역하는 사람도 청각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계속 만나면서 감각을 익혀야 해요. 계속 공부하고 시간을 투자해야 할 이유입니다.
설교통역을 하고 있다보니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표현할 때 쉽지 않을 때가 있어요. 요새 담임목사님께서 여호수아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지명이나 왕 이름이 연달아 나오면 손이 엄청 바빠져서 버거울 때도 있답니다. 그래도 이렇게 또 부족한 부분 훈련 받아서 능숙해짐에 감사할 뿐이에요. 수어가 여러가지로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소통하는 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해요. 요새는 농인들도 글로벌 시대에 맞추어 국제수화를 배우기도 한답니다. 얼마전에 BTS 뮤직비디오에 수화가 나와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던 것 기억하시죠? 그만큼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요. 우리나라 수어같은 경우는 나라에서 농인들의 ‘언어’로 공인을 해주었기 때문에 ‘수어’라고 부르고요. 국제수화같은 경우는 아직 문법적인 체계 정리나 여러가지 단계 상 ‘언어’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국제수화’라고 지칭합니다.
Q. 수어가 많이 보편화되고 기술도 발전했지만 여전히 소통하는 데 어려움은 있다고 들었어요.
시간이 갈수록 기술이 발전되고 우리 농인들의 교육수준도 많이 올라갔어요. 젊은 분들 중에는 영어를 하는 분도 꽤 계시고요. 그렇지만 연세가 조금 있으시거나 교육 수준이 높지 않으신 분들은 읽고 쓰는 것에 어려움이 있으세요. 우리가 ‘당근’을 종이에 써서 보여드린다고 했을 때 곧바로 ‘당근’이라고 인지를 못하시는 거죠. 대신 수어로 ‘당근’을 표현하면 곧바로 이해를 하시고요.
농인분들에게는 한글이 외국어나 다름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수어를 구사할 때 우리 한글 어순과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고, 축약 되기도, 추가 되기도 합니다. 초창기 수어 교육 때는 체계적으로 수어를 가르칠 농인선생님들이 없으셔서 단어단어를 배워서 한글에 끼워 맞추는 문장식 수어를 구사했었는데요. 이제는 농인분들도 교육 수준이 많이 올라가시고 농인들이 구사하는 관용수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겠다는 마음이 있으셔서 수어 교육을 농인분들이 직접 많이 하고 계세요. 조금 더 농인분들이 이해하기 쉬운 농식을 가르치기 위해 단어부터 먼저 가르치지 않고 제스츄어부터 알려드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하고 계세요. 예를 들어 커피를 마신다고 했을 때 ‘마시다’라는 수어를 가르칠 때 커피잔의 형태가 다를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동작을 달리 표현함으로써 풍부하고 융통성 있는 수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는거지요. 그리고 지금은 유투브나 줌으로도 수어를 어디서나 배울 수 있는 시대여서 그것도 감사할 부분인 것 같아요.
또한 요즘 수어통역이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형식적인 수어통역이 아닌 정말 농인 입장에서 알권리, 정보접근권 등의 보장을 위해 사회 전반에 걸쳐 모든 영역에 수어통역은 당연히 일상화가 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방송이나 공식적인 행사, 재난 상황 등에 있어 아주 작은 수어가 아닌,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이지도 않는, 기자나 사람들에게 가려지는 수어가 아닌 농인들이 수어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수어 하는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하는 농인들이 아닌 그들의 언어로 당당하게 소통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Q.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제목을 나누어주세요.
처음에는 저 혼자 설교통역을 쭉 했었는데 점차 동역자에 대한 마음이 생겨서 함께 섬길 분들을놓고 기도를 드렸어요. 4-5년 전에 저희 교회에 농인분들이 오기 시작했는데요. 그 동안 등록은 안하시고 예배만 드리시던 분들이었는데 그 당시 인터넷에서 화면 오른쪽 아래 작은 원 안에서 설교통역을 하던 저를 발견 하신거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오셨다가 농아부가 없고, 소통할 공동체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가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때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죄송한 마음에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저희 교회에 2019년 말에 농인사역팀이 생기게 되었고, 정말 주님께서 예비 해 주신 동역자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농인들과 함께 예배하고 농인들을 믿음의 제자로 세워가는 동일한 비전을 품고, 한걸음한걸음 다져가야 하는 시작 단계지만 지체들과 함께 하기에 연합하여 선을 이루실 주님을 기대합니다. 지금 설교통역 형태는 작은 통역 화면과 아울러 농인 성도님들을 위해 확대된 수어 통역 화면을 실시간으로 송출하고, 일대일 양육도 시작했습니다.
선한목자교회 장애인사역국 채널 링크:
농인분들이 든든한 믿음을 갖기까지는 수많은 기도와 수고가 필요한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듯이 농인도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라 생각합니다. 전에 저희 장애인사역국 담당 안재영 목사님께서 마가복음 7장에 예수님이 세상의 소리를 못 듣고 말하지 못했던 농인에게 그냥 말씀으로만 ‘에바다’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양 손을 귀에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신 후에 열리라고 말씀하셨다는 부분을 농인사역팀 모임 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멸시와 무관심으로 억눌렸던 농인에게 그들이 이해하기 가장 적합한 시각적인 동작으로 사랑표현을 하시고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농인들이 주님 사랑을 잘 이해하고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하셔서 그들의 영혼까지도 치유하신 것이지요.
이렇듯 우리도 그들을 그렇게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선교사님들이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훈련을 받으시고 선교하시듯… 농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고 크리스천 통역사들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농인들을 소외받는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수어라는 특별한 선물을 주셔서 그들도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 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농인, 청인 구분된 사회, 교회가 아닌 주님 안에서 함께 믿음의 동역자가 되길 기대합니다.
수어는 하나님께서 농인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Q. 마지막으로 저희 비앤알 Blessing and Resting을 풀어서 쓴 문장을 수어로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 당신은 이미 아름답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이 깨달음은 당신에게 진정한 복과 안식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