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서는 터득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온전히 세월이 알려주는 것. 세상을 다 산 것은 아니지만, 살아보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명예도, 돈도, 재능도, 성공도 아닌, 그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이다. 장영희 교수 책에는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있다.
이 책에는 2001년 미국 보스턴에서 안식년을 지내면서 한 경험들, 암이 재발하여 한국에서 머물게 되면서 일 등의 장영희 교수의 생의 마지막 9년간의 시간들이 담겨 있다. 자신의 삶을 ‘천형天刑 같은 삶’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은 누가 뭐래도 ‘천혜天惠의 삶’이라고 말한다.
세 차례의 암투병을 거치면서 다듬은 글들이지만 적절한 유머와 위트, 긍정의 힘, 정겨운 사람 내음과 온기가 읽는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지펴준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7개의 에피소드를 뽑아보았다.
1. 다시 시작하기
불편한 다리로 가족을 떠나 외로움을 견디며 보내온 6년의 미국 유학 생활. 인고의 세월끝에 완성한 박사 학위 논문을 짐가방과 함께 도둑맞았다.
“ 그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목발을 짚고 눈비를 맞으며 힘겹게 도서관에 다니던 일,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꼼짝 않고 책을 읽으며 지새웠던 밤들이 너무나 허무해 죽고 싶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외롭고 힘들어도 논문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만을 희망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이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몇날 몇일을 먹지도 않은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절망에 빠졌다고 했다.
“ 닷새째쯤 되는 날 아침,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들어 어두침침한 벽에 가느다란 선을 긋고 있었다… (중략)… 어지러움을 참고 일어나 침대 발치에 있는 거울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유령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내 속 깊숙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이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기껏해야 논문인데 뭐. 그래, 살아있잖아… 논문 따위 쯤이야.’”
그렇게 일어나 다시 1년을 미국에서 지내며 논문을 완성한다. 그리고 논문의 헌사에 이렇게 기록한다.
“내 논문 원고를 훔쳐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누군가 불합격과 실패의 좌절을 안고 다시 시작하면서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이 짧다지만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1년은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넘어지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아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험난한 인생 여정에서 넘어질지라도 절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2. 와! 꽃 폭죽이 터졌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 버릴 일상의 소소한 일들도 그녀에게는 좋은 깨달음이 되었나보다. 5살 짜리 조카, 건우를 돌보면서 느꼈던 몇일 간의 경험은 우리가 잃어버린 감탄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흐드러지게 핀 백일홍 나무를 보더니 “이모, 빵! 하고 꽃 폭죽이 터졌나 봐!… 와, 이모, 저 구름 좀 봐, 춤추는 하마 궁둥이 같아!…” 하고 신기해 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차로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건우가 강물을 가리키며 “이모, 저 꼬불꼬불한 물, 되게 예쁘지?” 또 한번은 뜰에 구부리고 앉아 나무젓가락으로 땅을 쑤시더니 “이모, 이 작은 게, 점 만한 게 움직여! 와, 이것도 생명이 있나 봐! 와!”
나뭇가지마다 빼곡히 핀 꽃도, 큰 하늘도, 뭉게구름도, 햇빛이 반사되는 수면도, 점만 한 생명도 내겐 너무나 익숙해져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서 5년이 채 안 된 건우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놀랍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동화하고, 감격하고, 환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이 ‘어린아이의 마음’은 불행하게도 살아가면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 속 깊숙이 숨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짓눌러도 우리 마음 속 어린아이는 죽지 않는다. 가끔씩 고개를 내밀고 작은 일에도 감동하는 마음,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슬퍼하는 마음으로 우리 가슴을 두드린다. 아무리 무시해도 “와! 되게 예쁘다” 감탄하고 함께 행복하고 싶어 한다.
3. 내가 살아 보니까
현대인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진짜 ‘나’보다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가 더 중요하다. 명품 핸드백에 중독된 한 젊은 여성에게 왜 굳이 명품을 들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이걸 들고 다니면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져요. 저를 쳐다보는…’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살아 보니까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 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라는 것이다. 명품 핸드백에도 시시한 잡동사니가 가득 들었을 수 있고 비닐봉지에도 금덩어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내가 살아 보니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깍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줄 알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을 희생하고, 내 인생을 잘게 조각내어 조금씩 도랑에 집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4. 괜찮아 – 깨엿장수 아저씨의 한마디
1살 때 걸린 소아마비로 평생 목발을 짚어야 했던 저자는 친구들과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없다. 하지만 제기동 작은 골목길에 목발을 옆에 두고 혼자 앉아 있었을 때 마침 골목을 지나가던 깨엿 장수를 만나게 된다.
“그 아저씨는 나를 흘낏 보고는 그냥 지나쳐 갔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와 내가 깨엿 두 개를 내밀었다. 순간 아저씨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잠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몰랐다. 돈 없이 깨엿을 공짜로 받아도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목발을 짚고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날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한 곳이라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선의와 사랑이 있고, ‘괜찮아’라는 말처럼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는 곳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나가던 깨엿장수의 뜬금없는 말 한마디가 우리에게 주는 작은 파장은 저자를 넘어 그 책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세상 사는 것이 만만치 않을 때, 죽을 듯이 노력해도 맘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이 아닐까. 넘어져 일어나는 것은 내 몫이지만, 내가 일어설 수 있게 용기를 주는 말, “괜찮아.” 이 한마디 때문에 이 험한 세상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지….
5. 마음 속의 도깨비 – 행복의 3가지 조건
마음 속에 불평이 일어날 때 되뇌여 보는 행복의 3가지 조건에 대한 좋은 글을 소개하고 있다.
‘행복의 세가지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을 위한 희망, 그리고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조건을 생각하다보면 항상 나의 불평은 감사로 끝이 난다. 지금의 내가 어떤 상황이든, 나에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일을 위한 희망이 있고 나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준다.’라는 말처럼 내 안의 모든 나쁜 생각이 3%의 좋은 생각으로 인해 다 사라져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6. 나의 불가사리 – 나 하나라도 / 나 하나쯤이야
거센 폭풍우가 지나간 바닷가의 아침. 어젯밤 폭풍우로 바다에서 밀려온 불가사리들이 백사장을 덮었다. 태양이 천천히 잿빛 구름을 뚫고 얼굴을 내밀기 시작할 때 한 남자가 어린 소년 하나가 무언가를 바다 쪽을 계속 던져넣는 모습을 보았다. 남자가 다가가서 소년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이제 곧 해가 높이 뜨면 여기 있는 불가사리들이 모두 타서 죽게 될테니까 하나씩 바닷속으로 던지고 있어요.”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을 보고 말했다.
“얘야,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네가 하는 일이 무슨 도움이 되겠니?”
소년은 불가사리 하나를 집어 힘껏 바다를 향해 던지며 말했다.
“적어도 제가 방금 바닷속으로 던진 저 불가사리에게는 도움이 되었겠지요.”
사람들은 흔히 ‘나 하나가 무슨’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나 하나 이 휴지를 줍는다고, 나 하나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나 하나 선한 일을 행한다고’ 세상이 바뀌겠나 생각한다. 하지만 ‘나 하나라도’ 그 일을 한다면, 최소한 내가 구한 그 한 사람에게는 인생을 다시 사는 기회를 주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어려운 사람이 수도 없고, 내가 후원하고 있는 에디오피아에도 어려운 아이들을 셀 수 없다지만, 그래도 내가 후원한 그 아이 하나는 이 세상에 그래도 소망이 있다고, 살 가치고 있다고, 살 만하다고 여긴다면 그것 하나로 만족한다. 이렇게 모인 ‘나 하나’가 결국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3%의 소금 같은 역할을 할테니까…
7. 김종삼 시인의 어부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략)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이 책의 제목인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김종삼 시인의 어부라는 시에서 가져온 싯귀이다. 이 시에 나온 것처럼, 세상에 다른 기적이 없고, 넓은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와 같은 나의 인생이 지금까지 무탈하게 지내온 것이 기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기적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기적이 되리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저자: 고故 장영희 교수는 태어난지 1년만에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서강대와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서강대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러 권의 수필집과 번역서를 출간했다. 2001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중 암이 전이돼 2009년 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