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손가락 끝이 아치 쉡(Archie Shepp)의 Cry Me a River를 반복해서 클릭하고 있다. 곡의 초반부터 두툼하게 밀려오는 아치 쉡의 테너색소폰 연주는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즉흥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의 잔의 마지막 커피 한 방울까지 입 속에 털어 넣어야 개운한 것처럼 어떤 음 하나도 그의 연주에서 헛되게 쓰여짐이 없다.
그가 70세에 이르러 녹음한 이 연주는 반세기 전 이 곡이 처음 나왔을 당시 이미 유명세를 탄 뮤지션의 그것 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이 있다. 아마도 아치 쉡이 오랜 세월 재즈와 함께 흑인 인권을 위해 저항했던 시대정신이 그만의 음색에 켜켜이 쌓여져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귓가에 Cry Me a River가 반복해서 맴도는 가을의 어느 아침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 해가 저물어 감을 알리는 이 계절이 올 때마다 내 계획대로 거두지 못한 열매에 대한 미련이 앞선다. 그래서인지 아침형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 공원으로 나섰지만 내 생각은 공원 밖을 떠다니고 있다.
한참을 걷다 공원 깊숙한 곳에 이르러 간신히 마음을 추스를 즈음, 고요한 아침과 호흡을 맞추는 이에 내 시선이 사로잡힌다. 황금빛 가을을 무대 삼아 미끄러지는 그의 노련한 움직임에서 세월의 내공이 엿보인다. 기대없이 나선 산책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이름 모를 고수를 통해 뜻밖의 사진까지 찍을 수 있으니 사진가로서 이보다 더 기쁠 수 없다.
많은 날이 쌓여 2016년이란 시간이 완성되었다. 때로는 일어나지 못한 아침도 있었고, 때로는 잠들지 못한 밤도 있었으리라. 우리네 삶은 내가 마음 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날들은 분명 내가 오늘을 살고있는 이유이자 내일을 위해 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아치 쉡의 연주가 음악을 넘어 그의 삶 자체로 감동을 더하듯 찰나의 이 순간도 소중한 한 음이 되어 우리 삶의 멜로디를 완성해간다.
아치 쉡(Archie Shepp)
미국의 프리재즈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가수, 시인, 극작가로도 활동하면서 흑인 인권운동과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있다.
촬영장소: 미국 뉴욕시 맨하튼 센트럴파크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 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 작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현재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으며, www.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