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5살이던 1995년 우리 가족은 경기도 성남에 있는 ‘산성동’에 살았다. 부모님은 사람들이 구멍가게라 부르는 작은 동네 슈퍼를 운영하셨다. 우리 가게 옆에는 계란과 쌀을 오토바이로 배달해주는 쌀집이 있었고, 상점들 사이에는 집들이 빼곡히 메워져 있었다.
아빠는 하루 종일 목욕탕 의자에 앉아 파를 까서 야채를 납품하는 일을 하셨는데, 엄마가 부업으로 차리신 ‘소망슈퍼’가 우리가족의 주수입원이었다. 슈퍼에 딸린 3평 남짓한 창고가 우리 가족의 집이었다.
나와 동생은 유치원을 다녀오면 가게 안 창고에 가방을 던지고 동네 애들을 다 모아 놀이터로 갔다. 놀이터에 몇 안되는 낡은 놀이기구들을 가지고 신나게 놀았다. 해가 기울어가면, 아이들은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갔고, 나와 동생은 옆집 태현이를 따라가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곤 했다.
엄마가 우리를 매번 데리러 오실 수 없었지만 우린 괜찮았다. 집에 가면 언제나 웃어주는 엄마가 있어 행복했고, 밤에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으면 통닭이나 붕어빵이 담긴 봉지를 들고 뛰어오는 아빠가 있어 좋았다.
주말이 되면 가게 셔터 문 닫는 소리에 맞춰 온가족이 토요 명화를 봤다. 두꺼운 담요를 덮고, 엄마가 양은 냄비에 찌고 있는 고구마 냄새를 맡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꿀 같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 까슬까슬한 수염을 내 얼굴에 비비는 아빠의 숨 냄새가 좋았다.
이런 나의 기억과 반대로, 나의 부모님은 우리 남매에게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미안해 하신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과 슈퍼를 운영하느라 가까운 나들이 한번 제대로 가지 못한 것을 말이다.
음료 박스가 한가득 세워져있는 창고에서 네 식구가 붙어 자야만 했던 것, 책 한권 읽어줄 여유가 없었던 것, 남들 다 놀러 가는 공휴일에 고작 큰 집 가는 것에 들떠있는 나를 보는 것이 영 편치 않고 항상 미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인생에서 그 때만큼 선명한 시절이 없다. 모든 것이 기억나고, 기억나는 모든 것이 아련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98년도에 우리 가족은 분당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시 나는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게 되었는데 새 집에서의 첫날 밤, 나는 옛날 집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고 한다.
단지 안에 놀이터도 있고, 처음 보는 경비실과 철 담도 있었다. 동생과 나의 방이 생겼고 모든 것이 윤택해졌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같이 살을 부대끼며 잔 적도 없었고, 엄마는 좀 더 먼 곳에서 장사를 시작해 이른 아침에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셨다. 학교 다녀온 후의 새 집은 내겐 그냥 ‘큰 집’일 뿐이었다. 분당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단정했고, 이웃과 이야기할 일도 없었다. 친구들은 학교 마치면 학원에 가기 바빴고, 그에 맞춰 나도 초등학교 3학년때 처음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고 보니 그 당시의 엄마가 이해가 된다. 아마도 나와 동생이 해맑게 웃으면 웃을수록 더 미안하고, 작은 선물에 좋아 날뛰면 가슴이 아렸을 것이다. 분당으로 이사한 후 대단하게 잘 사는 형편은 아닐지언정 남들처럼 공부도 가르치고, 집 같은 집에서 살 수 있으니 덜 미안하셨을 것이다.
친정 부모님이 어쩌다 손주들이 보고 싶어서 우리 집에 오신다. 아이들을 보며 같이 웃다가 내가 산성동 추억을 이야기하면 부모님 얼굴에 그늘이 생긴다.
“넌 왜 자꾸 그때 얘기를 해. 고생만 시켰는데.”
그 말이 잘 이해가 안돼서 그 때 마다 그냥 넘기곤 했다. 난 고생한 기억이 없는데 엄마는 자꾸 내가 고생을 했다는 하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기 때문이다.
이젠 엄마에게 그 말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 엄마, 나는 우리 아이들이 가진 것이 많아서 걱정이야.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워서 모자란 데서 자족하는 마음을 놓칠까봐.
슈퍼의 동전 세는 소리를 듣고 자란 나는 지금도 한 푼 한 푼 귀한 줄 알고 살고 있고, 행복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상황에 지칠 때 마다 소망슈퍼 창고, 내 머리 맡에 놓여있던 음료상자들을 생각해. 그 시절 나는 누구보다 행복했고, 내가 행복했던 이유는 내 옆에 있던 엄마, 아빠 때문이야.
밤마다 무릎으로 기도했던 엄마의 기도처럼 나의 기도도 절박할 수 있을까? 한푼 두푼 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던 엄마처럼 나도 내가 가진 것을 남을 위해 쓸 수 있을까? 전화 한통이면 배달되는 치킨에서 내가 느꼈던 아빠의 퇴근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때로는 굶주림과 가난함이 더 부요한 거라는 걸, 시간이 지나보니 알 것 같아. 그 시절의 엄마는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고, 나와 동생은 누구보다 우애가 좋았어.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일상을 놓치고 있는 내게 더 이상 그 시절을 미안해 하지 말아줘. 그 시절 우리의 산성동은 어느 때보다 찬란하고 가슴벅찼으니…”
글: 신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