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로 일하다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행복 시작일 줄 알았는데 첫째와 셋째가 지적 장애 진단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한 엄마이자, 아내, 여자인 이선미씨를 만나 그녀의 행복의 비결을 들어보았다.
Q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는지요?
첫째 아이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요. 사실, 그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한꺼번에 닥쳐왔던 것 같아요. 시부모님이 하시던 일이 안되서 스트레스를 받으시다 암판정을 받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어요. 남편은 동업을 시작했다가 동업자들로부터 인간적인 모멸감과 함께 큰 배신을 당하면서 대인기피증이 생겼어요. 재정적으로도 바닥이었고, 상황이 이렇게 힘들다 보니, 저희 부부의 관계도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어요.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기 때문에, 제 인생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느낌이었어요.
그 당시엔 깊은 우울증에 빠져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싫었고, 10분이 1년처럼 아주 길게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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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이가 몇 살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나요?
발달이 느려서, 생후 22개월 즈음, 대학병원에 갔는데, 뇌손상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의사 선생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얘는 지능이 60-70밖에 안 될거예요.”라고 하시는데, 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었어요.
Q 아마 간호사라서 장애의 정도를 더 잘 아셨던 것은 아닐까요?
네, 맞아요. ‘뇌세포가 손상되면, 회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호사로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절망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지적 장애’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신 지체’라고 했거든요. ‘정신 지체’라는 단어 자체가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어요.
제가 호텔에서 근무를 하면서, 자원봉사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어요. 지적 발달 장애인들을 위한 ‘스페셜 올림픽’이란 단체를 후원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장애인들을 보면서 속으로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제 마음 깊은 곳에 ‘내 인생에 저런 아이는 없을 것이다’라는 교만한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 같아요.
Q 장애 아이를 보면서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지적 장애아는 지능이 낮아서, 인지, 언어, 운동신경 등 전체적인 발달이 또래 아이들보다 많이 떨어진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뭘 하나 배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 전 그것을 인내해주질 못 했어요. 사실, 이 부분은 지금도 어려워요.
그 때는 ‘이 아이로 인해서, 내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생각해서, 아이를 보기만 하면 화가 났던 것 같아요. 아이가 뭘 잘 못하기만 하면 분노가 올라왔어요. 한편으로는, 아이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저의 악한 모습을 보면서, 심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어요. 너무 우울하고 힘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늪에 빠진 것처럼, 헤어날 수가 없더라구요.
Q 그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저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극복을 할 수가 없었어요. 노력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꼬여갔고 전 자포자기하게 되더라구요.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의 사람은 누군가가 구해줘야 하잖아요. 그때 주님이 저를 그 상황에서 건져내 주셨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말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교회만 열심히 왔다갔다했지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과 만나서 결혼 후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었어요.
그런데 마음이 힘들다 보니,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더라구요. 교회에 다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느 분이 저에게 치유집회에 가보라고 하셨어요.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결정해야 하는 시기라서, 매우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때였어요.
장애아 엄마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때가 아이가 장애진단을 받을 때이고, 그 다음으로 힘들어하는 때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할 때거든요. 특수학교를 보내야 할지, 일반학교를 보내야 할 지 정말 고민하게 되요.
전 아이의 치유를 목적으로 집회에 간 것인데, 거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었어요. 지식적인 믿음이 아닌 실제적인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그 이후 남편과 함께 신앙 훈련을 받으면서, 저와 남편에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불교 집안의 장손인데, 지금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일하고 있는 학원에 교회를 개척했어요.
Q 첫째에 이어 셋째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되셨을 때는 마음이 많이 힘드셨겠어요.
하나님 안에서 신앙훈련을 받을 때였어요. 훈련을 받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는지 몰라요. 모든 것이 그 분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셋째 아이 온이에게도 발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는지 몰라요. 첫째 제이의 장애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는데, ‘온이까지 장애아가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었지요. 그땐 ‘온이는 제발 정상적으로 성장하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 미쳐버릴 것 같아요’라며, 울면서 주님께 매달렸었지요.
그런데 그때부터 제 마음의 교만함과 죄악들을 하나 하나씩 깨닫게 하시기 시작하셨어요. 전 저의 추악한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계속 주위 사람들과 환경을 탓하고 있었거든요.
Q 셋째를 키우실 때는 첫째를 키울 때에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 있었나요?
첫째 제이를 키울 때는 아이 양육보다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었어요. 일 년 정도 휴직을 하면서 제이를 돌보다가 장애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휴직이 끝나자 마자 제이를 어머니께 맡기고 다시 일을 시작 했어요. 어찌 보면 현실 도피였지요. 제이는 어머니께서 키우다시피 해서 지금도 저와의 애착의 문제가 좀 있어요.
셋째 온이를 키우기 시작할 때는 저의 가치관이 많이 변해 있었어요. 무엇보다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위대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이의 성장과정을 보면서 장애아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알게 되었잖아요. 제이에게는 제대로 하지 못 했지만, 온이에게는 어떻게 해야할 지 더 잘 알겠더라구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아이들, 특히 특별한 아이들을 사랑과 인내로 양육하는 것이 아직까지도 쉽지만은 않아요. 매일 눈물로 기도하고 있답니다.
Q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래서 결국 첫째는 일반 학교에 갔나요?
믿음으로 일반학교를 보냈어요. 처음에는 선생님들도 제이도 모두 힘들어해서 ‘내가 과연 옳은 선택을 했나?’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했었어요. 사실, 그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긴 해요.
학습이 되질 않으니까, 도움반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교실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요. 그런데 반 친구들이 제이를 굉장히 잘 챙겨줘요.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서 제이를 만나면 반 친구들이 제이의 손을 잡고 함께 학교로 가고, 놀이터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며 같이 놀아준답니다. 그 아이들의 모습이 예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이런 것이 산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비장애 아이들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직접 생활해 보아야 장애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제이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견뎌야 하는 것이 있잖아요. 견디는 힘을 길러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동안 제이의 교육을 치료기관에 의존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가르쳐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는 제가 그런 것을 할 힘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제 자신이 정말 많이 회복되어서 이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큰 역경이었지만 이걸 통해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요?
성경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 없는 인생은 정말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가장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사실 지금도 배우고 있는 중이랍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우리 아이들은 효용 가치가 없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 아이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제가 뭘 잘해서 저를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 자체로 사랑해주시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저의 무능함과 처절함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힘들어하는 분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제가 느낀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엉망으로 사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도 잘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마음대로 잘 되지 않으니까, 오히려 자포자기해서 막 사는 것 같아요. 이젠 그런 분들을 돕고 싶어요. 그런 분들은 누군가 옆에서 계속 격려해주고 사랑해주면 반드시 회복될 수 있거든요.
저도 보통 엄마인지라 아마 저희 아이가 장애가 없었다면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들을 키웠을 거예요. 아이가 사회에서 성공하길 바라면서요. 사실 그래서 둘째 아이는 좀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년 전에 우리 둘째 솔이에게 틱이 생기면서 그마저도 내려 놓게 되더라구요.
정말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되는 길이 뭘까 하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지요. 돈 잘 벌고 높은데 올라가는 것이 세상적인 성공은 맞겠지만 그게 행복은 아니지요. 다른 대안이 없어서 사람들이 그걸 쫓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걸 알게 되니 다른 세상적인 기준들에 대해서 자유해지더라구요.
Q 아이들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다른 엄마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생각해보면 내 기준 때문에 아이들을 힘들게 하더라고요. ‘아이가 이 정도는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다 나의 기준인 거에요. 나의 기준에 차지 않으니까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거거든요.
그럴 때는 내 기준을 내려놓고 내가 왜 이렇게 행동을 하는지 내 자신을 살펴봐야 해요. 분노가 나는 것이 아이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분노는 나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거든요. 나의 수치심을 건드렸거나 나의 자존감이 상했다던지 하는 이런 것들이 아이를 통해서 드러날 때 화가 나게 되거든요. 그럴 때는 잠깐 멈춰 서서 나의 감정을 객관화 시키면서 그것을 차단하는 것이 필요해요. 그래서 사실 이 회복이 쉽지 않아요. 누가 나의 감정을 쉽게 객관화할 수 있겠어요.
Q 이야기를 듣다보니 둘째 아이가 참 특별하게 자랄 거 같아요. 다른 아이들이 못 가진 여러가지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경험했으니까요.
맞아요. 처음에 다른 장애아 엄마들이 막내 온이에게도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둘째 솔이를 가장 많이 걱정해 줬어요. 장애아의 형제로 살아간다는 것의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하는데,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잖아요. 어른인 저도 견뎌내기 힘들 때가 많은데, 이제 겨우 아홉 살인 솔이는 오죽 하겠어요. 옆에서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나이가 들어서, ‘사랑하고 인내하는 법’을 훈련 받고 있는 거잖아요. 솔이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을 배우고 있으니, 어찌 보면 참 귀하다고 봐요. ‘인내’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려야 배울 수 있는 것이니까요. 솔이는 다른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고 배려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잘 성장하리라 믿어요.
Q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아이들’로 자라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 세상에 세워나가는 아이들이 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