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선배와 식사를 하던 중에 전화기가 울린다. 선배의 집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아홉 살 난 선배의 딸이다. 나와 함께 답답한 시국을 논하다 걸려온 딸의 전화 한 통에 선배는 목청을 가다듬는다.
“응 그래그래, 알겠어. 하하. 아빠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오뎅(어묵) 꼭 사갈게.”
전화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게임 앱 하나 다운 받겠다고 졸라대는 아이들과 입씨름 하는 이웃 부모들과 달리 어묵 하나를 약속하는 이 부녀의 대화가 왜 그리 고전적이고 소박하게 느껴지던지… 짭조름한 어묵의 맛을 떠올리며 아빠의 퇴근 길을 바라보는 딸의 마음이 그렇게 예쁘고 기특할 수가 없다. 그 날 귀로 듣고 눈으로 상상하며 가슴에 담은 이 훈훈한 순간을 기억 속에서 꺼내 보고 또 보곤 한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에 탑재 된 센서의 성능이 5천만 화소수를 훌쩍 넘기고 있다. 몇 년에 걸쳐 차츰 개량되던 센서의 화소수는 단숨에 두 배가 넘게 개발되어 이전에 만들어진 카메라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최신 성능을 갖춘 카메라로는 좋은 사진들만 나올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흔히들 말하는 ‘지름신’에 홀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지름신’에 도전장을 내민다.
최신 성능의 카메라에 5분의 1도 안 되는 800만 화소의 카메라로 서울 시내의 한 고궁에서 담은 이 ‘세기의 커플’ 사진으로 말이다. 어르신의 굽은 자세와 살포시 모은 두 손에서 세월의 풍파를 견딘 소나무의 공손함을 엿본다. 더불어 어르신과 마주하는 어린 아이의 오른 손과 몸짓에선 세대를 넘나드는 소통이 보인다. 이들의 표정에서 ‘까꿍’의 화학적 반응은 절정에 다다르고, 마침내 250분의 1초 와 같은 빛의 속도로 걸작이 완성된다.
이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또 본다. 해를 거듭할수록, 기술의 발전이 주는 놀라움 보다는 구식이 될 수록 정겨워지는 일상 속 사귐의 언어가 가슴을 두드린다.
촬영장소: 서울 창경궁(사진 속 인물들은 실은 필자의 아버지(오른쪽)와 딸(왼쪽)이다.)
작가 소개: 윤한구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 양육과 함께 시작된 아빠 사진가의 길을 계기로 사진 세계에 입문.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저개발 국가의 척박한 난민 캠프이든, 화려한 도심 속 번화가이든, 강렬한 조명 아래의 런웨이든, 처음에 가졌던 아빠의 마음으로 사진 작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현재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으며, www.justfabulousmonk.com을 통해 그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