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호 Bnr이 만난 사람은 우리나라에 베이비박스 사역을 처음 시작하신 주사랑공동체의 이종락 목사님입니다. 장애인 공동체 사역으로 시작해서 베이비박스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분의 삶 속에 있는 비앤알 스토리를 만나보겠습니다.
Q 안녕하세요, 목사님.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사랑공동체’의 대표적인 활동(사역)으로 베이비박스가 알려져 있는데요. 베이비박스가 생소하신 분께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릴께요.
어떤 분들은 베이비 박스라고 하니까 아이들 용품을 갖다 놓는 곳인가보다 하고 용품을 갖다 놓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베이비박스는 아기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곳이에요 쓰레기통에, 비닐에 쌓여,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찮게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베이비박스란?
베이비박스(babybox)는부득이한사정으로아기를키울수없는산모가작은철체상자안에아기를두고갈수있도록만든것으로유기되는아이들의안전을위해만들어졌다.
Q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기도 하고 또 마음이 아프기도 하네요. 주로 어떤 사역들이 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주사랑공동체는 베이비박스만 운영하는것이 아니고 미혼모들의 카운셀링을 함께 하고 있어요. 상담까지 같이 하는 곳은 전세계의 베이비박스 사역 중 거의 유일무이해요.
일단 미혼모들이 아기를 데리고 오면 저는 처음에 그들을 칭찬해줘요. 대한민국에서 미혼모미혼부를 칭찬해 주는 곳이 없어요. 부모조차도 거부하죠.
하지만 저는 “네가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지켰다.”고 해줘요. 그리고 바른 성교육을 해요.
성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성은 쾌락의 도구가 아닌 생존의 도구이고 부부의 행복의 도구라고요. 그리고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해요. 정상적인 산모들도 산후 우울증에 걸리잖아요. 미혼모들은 산후 우울증에 빠져서 극단적인 생각도 하기 때문이에요.
만나서 아픈마음, 우울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로 무너진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얘기를 들어주는 거죠. 어떤 산모는 3시간 20분을 울면서 얘기하기도 했어요. 울분에 차서 얘기하는 것을 다 들어주죠. 그러고 나서 얘기해요.
‘이 아이를 위해 당신이 할수 있는 일이 뭐가 있냐’고 물어요. 그럼 대개 ‘아무것도 할수 없다’라고 대답하죠.
그러면 얘기해줘요.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는 엄마는 될 수 있죠?’라고 하면 망설임없이 ‘그럴수 있다’고 하는 산모도 있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건 할 수 있다고 하는 산모도 있어요.하지만 대부분 거의 100% 기도 하겠다고 해요.
그럼 내가 믿는 예수님을 당신도 믿고 예수님 이름으로 이 아기를 위해 부모로서 축복기도를 하라고 해요. 축복기도는 마음 속으로 해도 된다고 말해줘요.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라고 해요. 교회에 나가서 네 아픈마음을 주님 앞에 다 얘기하라고요. 그렇게 같이 축복기도를 해요.
놀랍게도 그렇게 하고 나면 어떤 산모들은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까지만 이 아기를 키워주세요’ 라고 이야기해요. 1년 8개월뒤 졸업하고 나면 자기가 데려가 키우겠다고요. 그래서 제가 키워줬고 엄마가 찾아갔고 지금 엄마가 키우고 있는 아이들이 지금까지 180명 정도가 되요.
Q 다시 데리고 가는 엄마들이 있군요. 어쩌면 저희가 편견으로 아이들을 버린 엄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정이 안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베이비 박스를 찾고 있는 거네요.
맞아요.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아픈 마음으로 왔다가 위로받고 치유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 마음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더 상담을 집중적으로 하는 거에요. 상담사들은 다 여자 목사님들인데 엄마의 마음으로 상담해 주세요. 지금은 30%정도의 엄마들이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고 있어요.
키우고 싶은데 오갈 데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9명 정도의 미혼모는 자립할 때까지 보호해주고 취업할 때까지 선교관에서 지내게 돕고 있어요. 어떤 산모는 학교에 복학하고 싶다고 하는 거에요. 어느 작은 기업의 후원으로 그 산모는 복학할 수 있었어요.여기서 7-8개월 동안 잘 보호해 주다가 어린이집 갈 수 있는 때가 되면 데리고 가서 키우는 거죠.
아이를 데리고 가면, 쌀, 기저귀, 분유, 옷, 장난감, 신발, 생필품, 생활비 지원을 3년동안 지원해줘요. 병원비나 방세가 없는 아이들도 지원해주고요. 그렇게 현재 100가정 정도 지원하고 있어요. 아이와 엄마가 안전하게 사회에 적응 할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입양을 원하는 아이들이 있는 경우는 출생신고를 하게 해서 입양을 도와주고 있어요.
Q 어찌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어떻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셨나요?
예수 믿기 전 파란만장한 세상적인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고 불같은 성령세례를 받았어요. 은혜 가운데 이 세상에 사는것이 가치있고 보람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권세가 기쁘고 행복했어요.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못 견뎌서 메가폰 잡고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하다 폭행을 당해 기절한 적도 있었어요.
Q 둘째 아드님이 태어날 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셨다고 하던데 그 때 이야기를 나눠주실 수 있나요?
둘째가 태어나면서 장애가 있어서 14년 동안 병원 생활을 했어요. 그 때 진짜 하나님을 만났어요. 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했는데 구원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어요.병원 로비에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데 목사도 아니었던 때에 사람들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했어요.
14년 병원 생활을 하다보니 병원에 오래 있어서 퇴원하고 싶다고 기도했는데 나를 보고 울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우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내가 너무 힘들어서 기도하는데 왜 다른 사람을 보고 우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너는 나를 알지만 저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퇴원하고 싶다는 기도를 더이상 못했어요.그 때부터 긍휼한 마음과 이웃에대한 사랑을 주셨어요.전신 마비 아들때문에 장애인 공동체를 먼저 만들었는데 그걸 통해 하나님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더라구요.
Q 사실 장애를 가진 자기 자녀를 돌보는 일도 정말 어려운 일인데 다른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절대 불가능할 거 같아요. 처음 장애 아이들을 맞이했을때 어떤 마음이셨나요?
병원에 있을때 우리 아들과 같이 전신마비인 손주를 둔 83세된 할머니가 찾아오시더니 “내가 3일 동안 지켜봤는데 자신이 늙고 병들어서 더 이상 외손녀를 돌보기 힘드니 나더러 자기 외손녀를 맡아 줬으면 좋겠다” 라고 하시더라구요.그 때 든 생각은 할머니가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제 정신이 아닌가 했어요.(웃음)
전신마비 아들을 둔 나의 상황을 보고 다른 아이까지 부탁하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그런데 그 분이 자기 외손녀를 맡아주면 예수를 믿겠다 하시는 에요.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때문에 한 영혼이 실족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억지로 ‘네’라고 대답했어요. 그러고는 할머니는 얼마 안 가서 돌아가셨어요. 그런 식으로 13명 아이들을 맡아 장애인 공동체를 시작했어요. 저녁에 우유 먹이면 아침이고 아침에 우유 먹이면 저녁이 되었어요.
낮에 겨우겨우 쪽잠을 자면서 버티다 보니 하루 종일 멍하고 귀에 염증이 생기고 이빨이 다 흔들리더라구요.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싶었어요.그러다 어느날 산책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앞 40분 거리 다녀올 수 있는 산에 다녀오고 하다보니까 조금씩 몸이 나아 지더라구요. 내가 다녀오고 집사람이 다녀오고 하면서 지내다가 봉사자들이 오면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이 아플때 고통스러울때는 저혼자 병원에 5명을 같이 데리고 간 적도 있어요. 앞에 두 명 안고 뒤에 업고 쌍둥이 유모차 끌고 가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죠. 돕는 사람이 없을때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셨고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죠. 그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 저를 철들고 성장하게 하셔서 지금 여기까지 왔네요.
Q 처음 베이비 박스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셨던 이유와 계기가 궁금합니다.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대책이 세워지지 않는 현실에서 하나님이 주신 개인적인 영적인 체험에 의해 시작하게 되었어요.낙태를 통해 찢어져 죽어가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를 환청과 환상을 통해 듣고 보게 되었어요.아무리 울어도 듣는 사람이 없이 지쳐서 죽어가는 아이들, 학대당해서 살해당해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하는 환청과 환상이 보이는데 살 수가 없었어요. 긍휼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사람은 아무데나 버려지면 안된다. 안전하게 두고 갈 공간이 있으면 아이를 지킬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2007년 새벽 3시에 누군가 대문앞에 아이를 갖다 놓았어요. 전화를 받고 문 밖에 나갔는데 아이가 생선박스에 들어 있더라구요. 1.8킬로된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다운증후군 아이였어요. 아이를 안고 들어오는데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거예요.잘못하면 대문앞에 아이의 사체가 발견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이전에도 문앞에 아이를 두고 가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안전하게 아이를 두고 갈 곳이 필요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너무 쉽게 작은 방을 하나 만들면 되겠다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렇게 대문옆에 작은 공간에 블럭을 쌓고 문을 만들어서 작은 방을 만들려고 했더니 구청에서 그런 건 불법건축물이 된다고 해서 포기했어요
그러다 2008년 6월에 체코에서 베이비박스를 만들어서 아이를 보호한다는 외신보도를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그래도 아이들을 대문 앞에 버리고 가는데 굳이 만들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도 들었어요. 머뭇머뭇 하다가 보니까 시간이 가고 자꾸 아이들이 버려지고, 죽는 아이들에 대한 신문 뉴스보도를 보다 보니 ‘저 아이들이 나 때문에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조급해 지더라구요.
처음엔 체코에 이메일을 보내서 베이비박스를 수입하려고 했어요. 독일,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에도 알아봤는데 답변이 없는 거에요.지금 우리에게 베이비박스에 대한 문의가 오면 바로바로 답을 해주는데 그 사람들은 답변이 없더라구요. 2009년 10월쯤 병원에서 인큐베이터를 보고 손짐작으로 신생아만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로 처음 만들게 되었어요. 70*60*40 되는 사이즈로 시작해서 그 베이비 박스로 1000명의 아이를 받았어요.
신생아만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양쪽으로 문을 만들고 밖에서 아이를 넣으면 안에서 ‘딩동딩동’ 소리가 나서 10초 안에 아이를 보호할 수 있도록 했어요. 안에는 항상 따뜻하게 보온이 될수 있게 했고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서 안에 불이 켜져있고 작은 cctv가 설치되어 내부를 볼 수 있게 해 놓았죠. 1741명의 아이들이 이제까지 베이비박스를 통해 들어왔어요.
Q 2009년 베이비 박스가 처음 설치된 이후 만 10년이 지났는데요. 이곳을 거쳐간 아이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을까요?
6개월 이상 키운 아이들은 다 기억에 남죠. 그중에 기억에 남는 아이로는 쌍둥이가 생각나요. 어느 날 베이비박스에 쇼핑백이 들어있는 거에요. 한 아이를 안아 올렸는데 아래 장애아가 또 한 명 있는거에요. 아이를 쇼핑백안에 포개어 넣어 둔거 였어요. 한 보육원에 두 아이가 같이 갔었는데 장애를 가진 아이가 많이 아팠어요. 그당시 사랑의 리퀘스트에 그 아이들의 사연이 나갔었는데 전화 한통이 왔어요. 자신이 아이를 베이비 박스에 놓고 간 쌍둥이 아버지더라구요. 아이들을 찾고 싶다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엔 찾아갔어요. 찾아갈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참 신기하고 놀라운 그런 일들이 많아요.
Q 버려지는 아이들이 없는 사회가 되기 위해 우리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나만 바라보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돌보아 주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작은자 들에게 인색하지 않아야 해요. 구원 받은 사람들은 행함이 따르게 되어있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자들에 대한 긍휼함을 회복해야 해요.‘작은자들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그 작은 자들이 지금 세대에게 주어진 주님이에요.그 사람들을 주님에게 하듯 섬기면 그것이 상급이고 위로예요. 그 안에 기쁨과 즐거움과 회복과 감격이 있는거죠.
우리가 가진 것을 흘려보내지 않으니까 사해바다처럼 되는거에요. 갈릴리 바다처럼 흘려 보내야죠.
지하철을 타고 오던 날이 있었는데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을 만났어요.내 주머니에 1만원짜리 딱 한 장 밖에 없었는데 집에 올 때 버스 타고 와야 할 돈이라 고민이 되는거에요. 그래도 마음 가는 대로 그 만원을 그 사람에게 주고 신림역에 내려서 45분을 찬양하며 기도하며 걸어 오는데 물밀듯 기쁨이 쏟아지는 거에요.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나서 전봇대를 붙잡고 울면서 기도했어요. 그 돈을 안주고 버스타고 왔으면 그 은혜가 임했겠어요? 쥐고 있는 기쁨과 나누어 주는 기쁨은 그렇게 차이가 나는 거예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어요.
Q 앞으로 목사님과 주사랑공동체의 계획이나 비전이 있으신가요?
내가 또 다른 계획을 세우면 인간적인 계획이 되기 때문에 전 계획은 없어요. 하나님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주실때 순종하면서 나가는 거에요. 하나님이 앞서가는 일을 하는거죠. 내가 앞서면 다른 사람과 교회가 고통스러운 거예요. 하나님이 앞서시면 평화로워지는 거죠.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있어요. 미혼모들이 지낼 수 있는 공동마을을 지어 살수 있도록 돕는 비전이 있어요. 자립할 수 있는 작업장도 만들려고 해요. 떳떳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으면 보람 있을 것 같아요.
장애인 치유센터를 세워서 전신마비 부모들이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와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의 부모님들은 아이 곁을 한시도 떠날 수 없어서 . 아이만 바라보고 사는 부모들을 도와야 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임시보호소 를 만들어서 단기간 그 아이들을 보호하고 그동안 그 부모들의 힐링을 돕는 그런 센터를 만들고 자폐아이들과 정신지체 아이들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승마체험장을 포함한 자연체험 농장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세상의 작은 자들을 위해 일하시는 주사랑공동체와 베이비 박스의 사역을 보며 이 땅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난곡동의 그 높은 길을 아이와 함께 오르며 그래도 그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미혼모들의 마음이, 간절함이 목사님에게 전달되어 지금까지 수 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글. 김정아,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