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마케팅 수업에서 우리들을 이끌어주시는 멘토님과 함께 상해 출장을 가게 되었다. 아시아의 뉴욕이라는 상해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멘토님이 일하시는 이랜드 상해 본사에서 현지 리더들의 강의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상해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작은 골목길에서도 느껴졌다. 신천지나 와이탄 같은 거리의 최첨단 건물들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출발하기 전부터 기대했던 이랜드 상해 본사는 큰 빌딩에 많은 한국 직원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현지 리더의 강의를 통해 이랜드가 중국의 각 성(성 하나가 우리나라 보다 큰 곳도 많다)에 진출한 현황, 높은 매출, 그리고 앞으로의 성장 계획을 듣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실제 상해의 가장 번화한 도심 곳곳에서는 글로벌 외국 브랜드보다 이랜드의 SPA 브랜드들이 좋은 자리에 매장을 가지고 있어 중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브랜드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방문한, 애슐리와 자연별곡을 하나로 묶어 런칭한 식당에는 웨이팅을 걸어놓은 고객들로 가득했다.
출장 전에는 곧 우리 회사도 중국에 진출할 것을 기대하며 이번 출장에서 그 접점을 찾아보려고 했었는데 왠지 상해 곳곳을 둘러보며 다른 기업들이 성공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한켠에 이런 것들이 마치 먼나라 이야기인 듯, 아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것만 같았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의 성공한 모습이 나를 더욱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보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힘든 마음이 가시지 않던 출장 마지막 날, 상해 임시 정부를 가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멘토님이 이끄시는 대로 도로를 걷다, “여기, 이 골목입니다.”라는 소리에 임시정부 건물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상가와 주택이 모여있는 허름한 도로 옆, 작은 골목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바로 그 곳은 3층으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이었는데 한 나라의 정부가 아니라 한 가족이 사는 주택이라 하기에도 작은 곳이었다. 1층의 작은 응접실 옆 계단 밑으로는 누추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간이 화장실, 그 옆으로는 솥단지가 두 개 걸린 초라하기 그지없는 부엌이 있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김구 선생님의 집무실(집무실이래 봐야 책상 한 두개가 놓인 것이 전부.) 마지막 층 또한 작은 일인용 침대 몇 개가 전부인 이곳이 정말 우리 나라의 임시 정부였던가. 지금도 임시정부와 마주한 골목의 주택들에선 중국 사람들이 빨래를 널고, 담배를 피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 곳이 그당시에는 오죽했을까 싶어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렇게 둘러보다 한 사진 앞에 내 발길이 멈췄다. 이봉창, 윤봉길 열사가 의거 전 수류탄을 들고 목에 서판을 매고 찍은 사진이었다. 작고 누추한 임시정부와는 다르게 그 분들의 얼굴은 결코 비굴해보이지 않았다. 분명 비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그 분들의 얼굴은 빛났고 신념으로 가득 차 보였다.
문득, ‘아… 이분들은 정말 믿고 있었구나. 대한의 독립을…’ 비록 지금은 어떤 가능성도 없어 보이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것이다. 포기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결국 독립할 것이고, 자주 국가로 바로 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1914년에 연해주에서 시작된 광복군 정부는 상해 임시 정부를 만들고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독립군에서 매국노로 변해버린 염석진(이정재)에게 임옥윤(전지현)이 묻는다
“왜 동지를 팔았나?”
“몰랐으니까…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알았으면 그랬겠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믿음이구나!’
나는 왜 상해 출장기간 동안 다른 성공한 기업들을 보며 위축되었을까? 그것은 무언가를 하루 빨리 성공해 내고 싶은 조급한 마음과, 그런 나의 기대와 달리 무거운 현실 때문이 아니였을까….
8년 전 빌드를 시작하면서 부터 지금까지 힘든 고비도 있었지만, 항상 고객을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옳은 가치에 뿌리를 두고 일해 왔다. 비록 지금은 내 꿈에서 멀다 하더라도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 그 꿈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꿈을 가진 나는 결코 나는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닌, 섬김!’
이 글은 한국의 테레사로 불리는 엘리제 셰핑 (서서평) 선교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좌우명으로 삼으신 글이다. 1934년, 영양실조로 돌아가셔서 당신이 시작한 일의 성공은 보지 못하셨지만 그분의 섬김은 대한 열정은 간호협회의 전신이 되는 ‘조선 간호부회’와 신학교 등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성공이 없다 할지라도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섬기겠다고, 그리고 언젠가 맺힐 그 열매를 소망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조선의 독립을 꿈꾸며 누추한 건물에서 믿음을 잃지 않았을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하며 말이다.
글. 빌드 디자인 실장, 김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