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미국 이민자로 하버드를 졸업한 후, 윌리엄앤메리 로스쿨을 나와 미국 버지니아 주의 명문학군인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19년째 교육위원으로 활동 중인 문일룡 변호사(교육위원)을 만나 그의 B&R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Q 안녕하세요 문일룡 교육위원님, 미국에서 19년째 교육위원으로 활동중이신데 원래 직업은 변호사시죠?
네. 제 본업은 변호사입니다. 제가 버지니아에 자리를 잡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할 당시 제 세대에서 한인사회에서 일하는 첫 변호사였습니다. 이민 와서 영어가 익숙치 않은 소상공인들이 법적 분쟁이 있을 때 미국 변호사와 소통을 하고 법적 조언을 받기가 힘들거든요. 그런 분들이 저를 많이 찾아오셔서 제 고객의 대부분이 한국분들이셨어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떠나 온 미국
Q 원래 미국에서 태어나신 건가요? 아니면 이민을 오신건가요?
제가 고등학교 재학 중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어요. 저희 집은 정말 가난했어요. 초등학교때는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들고 간식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죠. 학교에서 배식받는 옥수수빵이 유일한 간식이었어요.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서 한 시간이 걸렸는데, 제가 받은 옥수수빵을 집에서 제 동생이 하루종일 기다렸어요. 남겨줘야지 했지만 가다보면 너무 먹고 싶어서 야금야금 먹으면서 집에 가곤 했어요. 떼어먹다가 동생에게 도착할 때 쯤이면 손가락만한 크기의 빵 밖에 안 남을 때도 있었죠. 그래도 어린 동생은 원래 빵의 크기가 얼마만했는지도 모르고, “형, 고마워!”하고 맛있게 먹었어요.
그런 동생이 뇌염에 걸렸는데 돈이 없어서 병원 문턱 한번 가보지도 못하고 떠났어요. 그때 저희 아버님이 우시는 것을 처음 보았어요. 그래서 동생이 떠난 후 몇 년이 지난 1974년에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어요. 중간에 월남에 가셨던 아버지가 미국에 가는 방법을 아시고는 가난을 극복 할 수 있는 방법은 떠나는 방법밖엔 없다고 떠나자고 하셨죠. 그때 당시 미국 올때 저희 집에 있는 정리하고 비행기표를 사고 남은 돈이 20불이었어요. 그때 저희 아버님은 식구들보다 1년 먼저인 73년에 미국에 가셨죠.
Q 아무 기반도 없이 미국에 오시게 되서 여러가지가 힘드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월남에서 전동기 수리하는 일을 하셨어요. 그 일을 미국에 와서도 계속하셨어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라 언어, 문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 저희 가족이 버지니아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시티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당시에는 한인들이 많지 않았어요.
*버지니아와 워싱턴 D.C는 미국의 동부에 서로 붙어 위치해있다. 워싱턴 D.C는 미국의 수도이다.
영어로 말도 제대로 못하던 학생, 하버드에 합격하다
Q 언어의 장벽으로 많이 힘드셨을텐데, 어떻게 하버드에 들어가실 수 있었는지 궁금해요.
미국생활이 힘들 거라는 건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주위에서 열심히 하면 영어도 배우고 대학도 갈 수 있을거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저는 대학은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새벽에 출근하시면서 저를 학교 앞에 내려주고 가셨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학교 문도 열리기 전이었어요. 선생님과 학생, 직원을 통틀어 제가 제일 먼저 학교에 오는 학생이었는데, 과학주임 선생님이 항상 일찍 출근하셨어요. 말도 안되는 제 영어를 한 시간 동안 들어주시고, 저랑 대화를 해주셨어요. 선생님은 문법도 억양도 이상한 제 영어에서 저의 잠재능력을 발견하셨던 것 같아요.
미국간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제 영어점수로만 치면 대학합격은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고 2때 미국에 와서 11학년으로 가야했지만, 영어가 안되어서 10학년으로 시작했고, 1년 2개월 뒤에 SAT(미국의 수학능력평가)를 봤는데 영어 점수가 정말 안좋았어요. 하지만 수학이 만점이 나와서 이공계로 유명한 학교에는 지원할 수 있겠다 싶어 준비했죠.
Q 수학을 참 잘하셨나봐요.
수학을 잘하기도 했지만 공부도 많이 했어요. 제가 11학년(우리의 고2) 때 수학경시대회에 나가면 늘 성적이 좋았어요. 그래서 어떤 대학에서는 대학 합격과 함께 4년 장학금을 보장해주는 상을 받기도 했어요. 12학년이 되어서 대학원서를 쓸 때는 그보다 더 높은 학교에 지원했어요. 그때 넣은 학교들이 MIT 공대, 칼텍, 하버드였는데, 생각지도 않게 모든 학교에 합격을 했어요. 부모님은 동양인이 미국에서 자리잡고 살기엔 이공계가 좋으니 MIT에 가라고 하셨고 과학 주임 선생님도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전 하버드가 가고 싶은 거에요 (웃음).
그래서 선생님께 왜 하버드를 가면 안되는지 계속 상담을 했는데, 제가 계속 물어보니 결국 지친 선생님이 그럼 그냥 하버드 가라고 하시더라구요. 전 하버드를 가겠다는게 아니라 왜 하버드를 가면 안되는지를 물었던 건데요 (웃음).
*MIT는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칼텍은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하버드는 Harvard University로 모두 미국의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힌다.
Q 영어를 잘 못하는 학생이 하버드까지 진학하게 된 것은 물리 선생님의 도움이 컸네요.
그렇죠. 물리 선생님은 저를 참 아껴주시기도 했지만 잘못된 것 또한 정확히 지적해주시는 분이셨어요. 12학년 졸업반 때 학생들 가운데서 가장 똑똑한(the most intellectual) 남학생 1명, 여학생 1명을 뽑아 상을 주었는데, 제가 가장 똑똑한 남학생으로 뽑혀서 실험실에서 교내 신문에 실릴 사진을 찍게 되었어요. 실험실에서는 항상 보호안경을 써야 하는데, 보호안경을 쓰고 찍었더니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안된다고 해서 보호안경을 이마에 올리고 사진을 찍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실험실에 들어가려고 보니 빨간 글씨로 ‘가장 똑똑한 사람이 실험실에서 보호안경을 왜 바보같이 썼냐’라고 질책하는 글과 함께 교내 신문에 실린 사진이 함께 붙어있었던 적도 있어요. 처음엔 누가 이렇게 썼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선생님이셨어요. 어느 상황에서건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는 분이셨죠.
변호사의 꿈을 이루고, 교육 위원 선거에 도전하다
Q 하버드를 졸업하시고 다시 법대에 진학하여 공부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본래 한국에 있을 때부터 법대에 가서 변호사가 되는게 꿈이었어요. 미국에 와서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상상도 못했지요. 하버드를 졸업한 후에 다시 꿈을 이뤄보리라 변호사가 되자고 결심해서 버지니아에 있는 법대인 윌리암앤메리 (William and Mary)를 다녔어요.
*윌리암앤메리 로스쿨은 버지니아 주립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로스쿨이다.
Q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시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교육위원 선거에 도전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84년에 졸업해 변호사로 일을 하며 86년에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았어요. 제 고객의 대부분은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신문을 보고 한인교회에 가고 한국비디오를 보고 한국 친구를 사귀고, 고객들과도 한국말로 대화하고, 생활의 95%는 한국말을 사용했어요. 그래도 제 삶에 만족하고 보람되게 살았는데 어느 날,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미국이란 큰 땅덩어리에서 왜 작은 한인사회에 국한되어 살고있지?’
‘우리 아이들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며 이 미국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데 왜 나는 이민자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한국에서는 가난했지만 여러가지 꿈을 꾸었는데, 이민자로 사는 미국에선 꿈도 못꿀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거죠.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워싱턴 포스트에서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이 처음으로 임명제에서 선출제로 바뀐다는 기사를 읽었고 꼭 도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현재 활동하시는 패어팩스 카운티는 미국내에서도 경제, 교육 수준이 높은 곳으로 유명한데, 어떻게 교육위원으로 당선되셨나요?
그때가 95년도였는데, 큰애가 7살, 둘째가 4살이었죠. 처음 선거에 관심을 가진 것은 94년도였는데 그때는 미국의 교육이나 교육위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교육위원회 회의에 가기 시작했어요. 정기회의, 소위원회 모임 방청석에 앉아 듣다보니 여러 교육적 사안에 대해 알게 되면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교육위원후보로 출마하려면 선거조직이 있고 정당조직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저는 민주당의 후원을 받아야 했는데, 그때 민주당 후원을 받기 위한 후보자가 35명이나 있었어요. 후원받을 지역구 9명 광역 3명을 뽑는 선거에서 광역의원으로 임명되고 싶었는데, 4등을 해서 떨어졌어요. 백인 1명, 남미계 1명, 흑인 1명이 뽑혔어요. 당선된 백인은 그당시 카운티 전체 학부모회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고, 남미계와 흑인은 민주당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람들이라 제 순서까지 올 수가 없었어요.
‘나는 후원없이 그냥 출마하겠다’ 라고 선언했는데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민주당 의원장에게 전화가 와서 지난번 광역 후원 받기 위해 인터뷰 할 때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탈락해서 유감이었다며 우리 지역에서 출마하지 않겠냐는거에요. 내정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상대 공화당 후보가 너무 강해서 포기 하는 바람에 새로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거에요.
광역의원만 준비하다가 지역의원으로 제대로 준비를 못했지만 출마하게 되었어요. 선거 활동은 힘들었어요. 페어팩스가 원래 중상류층 백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지요. 유색인종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당선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51%로 당선이 되었어요.
95년에 미국 동부에서 최초로 한인 선출직 공직자가 된거죠. 그 후에 광역의원으로 다시 출마해서 4번 당선이 되서 현재 5선 의원이 됐지요.
한인 교육위원, 한국과 국제교류를 시작하다
Q 교육위원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교육위원과 교육감이 하는 일이 뭘까요?
한국에는 17개 교육청이 있는데 미국에는 15,000의 교육청이 있고 대부분은 소규모로 약 2,000명의 학생을 가진 학군이 상당합니다. 제가 속한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청은 19만명의 학생이 있는 미국에서 10번째로 큰 교육청이에요. 일산보다 크고 인천보다는 작은 정도의 교육청이죠.
대부분의 학군에서 교육감은 고용제에요. 선출된 교육위원이 전문 교육 경영인인 교육감과 계약을 맺고 고용하는 거죠. 교육위원은 교육감의 업무를 지시, 감독, 평가, 고용, 파면, 예산결정, 교사해고, 교육정책 결정과 같이 중요한 일을 해요. 교육위원은 앞서 말씀드린 것 처럼 선출제로 정해지고 정규직이 아닌 명예직이에요. 우리가 주민대표 인거죠.
Q 교육위원으로 일하시면서 한국과 미국의 국제교류 관련 일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는지요.
현재 패어팩스카운티에 한인학생수가 학교마다 다르긴 하지만 평균 4-5% 정도 되요. 한국인이 거의 없는 지역도 있지만 20%나 되는 곳도 있어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나 고위직 행정직들이 한국을 알아야 패어팩스에 있는 한인 학생들이나 부모님들을 잘 이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국제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Q 사실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매년 휴가때 미국의 교육자들과 함께 한국으로 오신다고 들었어요.
교사와 학생들이 한국을 직접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추상적으로 한국이란 나라와 문화,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에 대해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가서 보는 것은 굉장히 다르거든요. 설사 부정적인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직접 가서 보고 오면 공감대가 생기면서 한국인들을 이해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가능하면 교육감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한국으로 데려가서 한국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지금도 한국이 세계 11번째 경제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는 아직도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Q 한국에 오시면 주로 어떤 일들을 하시나요?
DMZ도 가서 뉴스로만 알던 남북의 분단상황을 직접 보게하고, 되도록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골목 안 후미진 식당에서 김밥도 먹어보게 하는데 다들 정말 잘 먹더라구요.
한국에서 뭔가를 배우고 온다기 보다 한국을 경험하는 거죠. 한국에 한번 다녀오면 우리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정말 많이 바뀌어서 와요. 한국방문을 했던 한 교장 선생님이 지방에 KTX를 타고 갔다가 서울역에 자정에 도착해서 가방을 끌고 남대문에 있는 호텔까지 걸어갔는데, 밤 길이 너무 안전하다며 신기해했어요.
Q 한국과 미국의 교류를 위해 노력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미국인들이 중국이나 일본을 가는 일은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을 가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갈 기회가 없어요. 패어팩스 카운티의 학교들은 미국에서 다른 학군들이 벤치마킹하는 강남 8학군 같은 곳이에요.
미국 표현으로는 등대 같은 곳이라고 하는데 여기 주민들 대부분은 연방정부 고위공직자나 세계각국의 외교사절들이기 때문에, 이 곳에 있는 학생, 교사, 주민들에게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호감을 가지게 하면 그 사람들의 정책반영에 도움이 될거라 생각해요.
한국을 경험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외교관들이 우리나라를 좋게 기억하듯이 국제교류처럼 우리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의 자녀들, 내가 좋아하는 일, 내 삶의 B&R
Q 저희 잡지 인터뷰에 꼭 등장하는 질문인데요. 문위원님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B&R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 삶의 블레싱은 제 자녀들이에요. 두 아이 모두 신앙심과 남을 배려하는 깊은 생각과 뛰어난 두뇌를 가졌어요. 제 삶의 레스팅은 바쁘고 분주한 상황 가운데,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니 노력하는 것이 힘들기 보단 보람되거든요.
Q 교육위원으로서 한국의 젊은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당부의 이야기가 있으시다면요.
제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셨던 분은 국민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셨어요. 한반에 100명씩 있던 시절이었죠. 제 자질을 봐주셨 는지, 저보고 친구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라고 해서 매일 십분씩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친구들이 참 재미있게 들었어요. 하다보니 이야기가 바닥나서 책을 읽을 때도 있었는데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발표력이 늘었어요.
어느 날은 세 권짜리 컬러책을 주셨어요. 저희 집 형편에 살 수 없는 책이었는데 돈 걱정 말고 그냥 읽으라고 주셔서 인류의 기원, 우주의 세계, 동물의 왕국을 몇번이나 읽었는지 몰라요.
미국에 와서 교육위원으로 일하며 선생님 생각이 나서 찾으려고 했지만, 이미 학교를 그만두셔서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사관에 연락을 해서 도움을 받아 선생님을 찾았는데 일산에 살고 계셨어요. 만나서 제게 책 주셨던 일을 이야기하며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책 값이라고 생각지 마시고 좋은 일에 쓰시라고 감사의 표시를 드렸는데 안 받으시는거에요.
선생님은 끝까지 사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실 나는 좋은 선생이 아니었어. 보통 선생도 아니었을지 몰라. 문군이 그 때 일을 얘기하니까 두려움이 생기네. 사실 나는 문군에게 했던 일이 기억은 안나지만 문군이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해주는데, 만약 내가 학생들에게 잘못한 일들이나 잘못 말한 것들이 있다면 그 학생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상처가 되었겠나 생각하면 두렵고 떨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말 한마디나 행동 한가지가 누구에겐 평생 좋은 기억으로 남던지 평생 아픔으로 남을 수 있으니 얼마나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귀한 가르침이었어요. 선생님의 한마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Q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일까요?
버지니아주 전체 차원에서든, 연방정부 차원에서든, 제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15년 정도 남은 기간 동안 좀 더 크게 교육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버지니아 주 교육부 장관을 하며 미국과 더 나아가 미국과 한국, 세계의 교육에 선한 영향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 BnR 기자단
글 황인영, 김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