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아동을 위한 어린이 집을 18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신월동의 베다니집의 원장이자 장애아들을 가진 엄마로서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아내고 있는 김영란 원장을 만나 그녀의 삶에 드러난 비앤알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Q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베다니 어린이집의 소개를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저희 어린이집은 법적인 용어로 장애전문 어린이집입니다. 2000년 6월에 서울시에서 지정을 받아서 운영하고 있는데 법인이 아닌 임의 단체로 민간등록되어 허가 받은 어린이집입니다.
사실 이 어린이집 전신은 조기 교실이었어요. 장애 아이들은 일찍 장애를 발견할수록 예후가 좋거든요. 조기 교실이라는 것은 조기에 발견을 해서 조기 교육을 하고 조기 치료를 하면 장애아동들이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꾼 자선사업가의 꿈
Q 특수교육을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쪽으로 진로를 결정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 당시는 복지시스템이나 특수교육에 대한 개념이 많이 없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고아원 운영같은 자선사업에 꿈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사회사업이나 사회복지에 대한 전형을 찾아 보다가 장애 아이들을 교육하는 특수교육과가 눈에 들어와서 이대에 지원을 했고 그 때부터 특수교사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이었죠.
Q 한국기독인회에서 처음에 이 어린이집을 설립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단체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되셨나요?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 쯤 저희 오빠가 ESF(기독대학인회)라는 선교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신앙생활 안하던 오빠가 대학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하고 변화되는 것을 지켜봤어요. 그래서 이대에 들어가서 학교 근처에 있는 서대문 ESF 지부에 가서 면접을 보고 합격 한 후 활동을 시작했어요. 거기서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 31절이 저에게 꽂혔어요.
창 1: 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7남매중 여섯 째였던 저는 자존감도 낮고 말도 없고 순한 아이,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어요.
그래서 어려서 부터 공부 열심히 하고 인정받는 것이 전부 인줄 알고 살았는데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구나’를 느끼면서 자존감이 회복되었어요.
저희 가정이 아빠의 역할이 부재였기 때문에 엄마가 모든 역할을 하셨거든요. 아이들이 많아서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시면서 저희를 가르치셨어요. 엄마는 아들을 선호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고 본인은 말씀하시지만 저희 오빠를 많이 의지하고 서울대에 간 오빠에 대한 기대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나도 아들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성경을 통해 여자든 남자든 내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고 나를 통해 큰 일을 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조금씩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1500만원의 후원금으로 시작한 베다니 어린이집
Q 처음 베다니 어린이집을 설립하게 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저희 선배들 중에 이대 특수 교육과 선배들이 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끼리만 좋은 것을 나눌 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요. 그 당시에는 복지관이 고덕동에 있는 서울 종합 장애인 복지관 정도 밖에 없을 때였는데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우리가 직접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죠.
사실 국가나 기업에서 지원이 받지 않고 개인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큰 일을 하기엔 쉽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 졸업생과 재학생들의 후원금과 미국, 영국의 교회나 개인 후원 오천원, 만원씩을 모아서 1년 동안 1500만원을 만들었고 그 돈으로 17평 정도 되는 목동의 집을 임대해서 시작한 거죠.
지금처럼 홍보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지 않아서 주로 벽보를 붙여서 홍보를 했어요. 그 벽보를 보고 첫 해에 3명의 장애 아동이 왔어요. 교사 2명, 아이 3명으로 시작했는데 금방 소문이 나서 해가 가면서 아이들이 많이 늘었어요.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어서 교사를 더 뽑고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했어요. 그 곳에서 3년 정도 운영하다가 너무 좁아져서 신월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어요. 48평짜리 두배로 큰 공간에서 5년정도 하다가 아이들이 더 늘어서 70평 정도 되는 건물로 이사를 할 정도로 아이들이 모여들었어요.
Q 초기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어떤 점이 어려우셨나요?
그 당시 아이들에게 운영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인 월 3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10년 가까이 돈을 올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큰 건물로 옮기면서 1:1치료실을 운영하게 되었어요. 정신지체나 자폐, 뇌 병변으로 인한 언어중복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언어치료와 인지 학습이 안되는 아이들을 위해 언어치료사등 치료사 두 세명 두었고 교사도 7-8명 정도로 늘면서 인건비 감당이 안되더라구요.
- 뇌병변: 외부 신체 기능 장애의 하나. 뇌의 기질적 손상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발생하여 보행 또는 일상생활 동작 등에 현저한 제약을 받는 중추 신경 장애이다. 뇌성 마비, 뇌졸중 등이 있다.
- 언어중복장애: 언어장애와 다른 장애를 합병하고 있는 중복장애
사실 저희들 모두 거의 자원봉사자처럼 일했지만 일정 정도의 인건비는 필요했는데 후원금으로는 더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러다 IMF가 터지게 되었고 후원금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아이들은 계속 늘어났고 그러면서 저희의 빚도 늘어나게 되었어요.
처음 저희가 이 일을 시작했던 목적은 이 지역에 장애아동을 위한 기관이 없었고 대형 교회나 국가에서 이 일을 하지 않으니까 그 일에 도전을 주자라는 비전이 있었는데 13년 정도 하고 나니까 주변에 복지관도 생기고 특수학교도 생기고 대형교회들도 이 일을 시작해서 이제 우리는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필요로 하고 찾는 5-60명의 아이들을 두고 문을 닫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10명 정도의 교사들이 우리가 받아야 할 급여나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도 내놓고 다시 시작하자라고 하면서 이어 나갔어요.
사실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장애 전문 어린이집에 필요한 교사 모집’이예요. 이 일은 장애영유아보육교사와 유아특수교사가 필요하거든요. 장애영유아 보육교사는 그나마 괜찮은데 유아특수교사를 구하는게 더 문제에요. 유아특수교사는 임용을 보고 유치원이나 특수학교 병설에 가게 되면 특수교사의 대우를 받을 수 있어요. 1시까지 근무하고 이후에 자기 업무 보고 4시 퇴근, 출산휴가, 연수, 방학 등이 있고 임금과 수당 차이도 커요. 하지만 어린이집은 하루 12시간 근무에 방학도 없고 임금도 낮고 사회적 인식도 낮지요. 그러다 보니 지원자가 많이 없어 좋은 교사를 구하는 것이 많이 힘들어요.
장애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
Q 아이들을 가르치시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예전에는 장애아를 가진 부모님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서 집에서 데리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희 어린이 집을 다니게 되면서 부모님들이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꿈을 가지게 된 게 보람이 있어요.
우리 원생들은 주로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 중에 음악적 재능이 있는 친구가 있었어요. 90년도에 5살이었으니까 지금 30대 중반이 되었을 거에요. 자폐아이고 뇌수종으로 수술을 여러 번 했었는데 처음엔 미술을 하다가 첼로로 전향하면서 현재는 세계적으로 연주를 하고 다니고 있어요. 또 다른 아이는 플룻을 하는 아이였는데 그 아이도 청음 능력이 탁월했어요. 지금은 대학졸업까지 했어요.
저는 성공하고 유명해져서 드러나는 것만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우리 아이들은 3세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있는데, 처음에 들어와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스스로 먹고 대소변을 가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표현도 하는 것이 기적이지요. 그렇게 아이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가정이 밝게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이 저희의 기쁨이자 자랑이예요.
Q 아이들이 조금씩 자립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네요.
네. 단순히 자신을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 되면 보호작업장에서 일을 해요. 어머님들이 ‘우리 아이가 자기 이름으로 월급 통장을 갖게 된 근로인이 되었어요’ 라고 적은 금액이지만 월급을 받고, 아침에 나가서 오후에 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하세요.
사회에 나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첫번째 과정인 이 조기교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에 정말 중요해요. 사실 대부분의 어머님들은 자신의 아이가 장애인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빨리 장애인임을 인정하고 부모가 어떻게 대처하느냐 따라 아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저희는 부모교육도 같이 하고 있어요.
둘째아이의 청각장애 진단
Q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하시느라 바쁘실 거 같은데 가정에서의 삶은 어떠셨나요?
95년에 제가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3개월 후에 그 아이가 청각장애인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많이 아파서 병원을 많이 다녔는데 왠지 잘 못 듣는것 같은 거에요.
아이가 체력도 떨어지고 체중도 줄어서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사를 해보니 장애가 있었어요. 생후 5-6개월 때까지 계속 중이염에 걸리는 것이 이상해서 검사해보니 귀뼈를 갉아먹는 암에도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어릴 때 가정 내에서 제가 존재감이 없었다고 말했었지만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고 시댁과의 문제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진 않아도 살만한 삶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큰 아이는 건강하고 어디서나 칭찬받는 아이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그런데 둘째를 낳고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아침을 맞이하는 게 두려웠어요.
저는 베다니 일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수도 적고 운영상태도 불안정했지만 보람도 있었고, 국가지원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제약을 받지 않고 엄마들이 요구하는 것들도 충분히 수용하면서 일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그런데 둘째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되고는 가족들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희 남편과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줄테니 일을 하라고 하셔서 쉬지 않고 하게 되었습니다.
Q 둘째 아이가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충격이 크셨을 것 같아요.
이런 일에 종사하시는 분들 중에는 다른 일을 하다가 자기 아이의 장애 때문에 전공을 바꾸신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저는 원래 이 일을 하다가 장애아이가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실제 그 일을 겪은 것은 머리 속에 있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어요. 저희 아이는 고난청이라 비행기 소음정도의 소리가 나야 소리가 있다 없다를 구분하는 정도예요. 처음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주셨지 하면서 하나님께 많이 서운했어요.
Q 둘째 아이를 장애를 알고 나서 달라지거나 느끼신 점이 있다면요.
전에 학부모님들이 어린이집에 오시면 원장으로서 제가 위로를 많이 했었어요. 진심으로 용기 내시라 하고 좋아질 것이라고 얘기 했었어요. 그런데 내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까 다른 사람의 위로가 하나도 들리지 않더라구요. 그때 ‘내가 한 위로가 아무 도움이 안되었겠구나. 그동안 내가 다른 엄마들에게 공감은 했지만 그들이 느끼는 그런 마음은 알지 못했구나’ 라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부모님들의 마음을 더 알게 됐어요.
그때 우리 어린이집에 저희 둘째 아이와 같은 해에 아이를 낳은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아이는 너무 잘 자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 애를 보면 제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왜 우리 아이는 장애가 있을까… 그동안 베다니에 우리 큰애를 데리고 여러 번 왔었는데 그 아이의 발달을 보면서 또래 아이를 둔 엄마들의 마음이 힘드셨겠구나 라는 걸 알았죠. 조금 더 어려움이 있는 분들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알게 된 산 경험을 한 거죠.
청각장애아들을 위한 소통의 공간을 꿈꾸며
Q 앞으로의 비전과 계획이 있으신가요.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처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애아동을 돕는 일들을 시작하게 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이루실 꺼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그동안은 임의 단체로 있었는데 이제 법인등록을 해야 해요. 그러려면 건축을 해야 해요.
이제까지 저희가 기관들을 넓혀 나갔던 이유는 아이들이 조기교실 교육을 끝내고 취학연령이 되어서 치료실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거든요. 성인이 되었을 때는 주간 보호를 해서 보호 작업장에도 갈 수 있도록 지도했구요. 부모님들은 이곳 이후를 연결해주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세요.
서비스가 필요한 곳이나 상담이 필요할 때, 아니면 다시 저희 기관에 들어와야 할 때 한번 들어온 친구들은 저희가 주치의가 되어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고 자립할 수 있도록 자기 역량을 강화시켜 주는 그런 역할을 저희가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건 저희 둘째 때문에 생긴 꿈인데요. 저희 둘째 아이가 대학을 가고 졸업 후에 농아전문 상담사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농아인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요.
사실 저희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어려움이 있어서 상담이 필요해도 농아인 교사는 학교에 한 두 명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농아학교인데도 불구하고 수화를 못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아서 제대로 의사전달이 안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농아인들이 어려움이 있어서 상담이 필요할 때 보통 수화가 아니라 농아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약자나 은어로 된 간단한 수화가 있는데 일반 수화 상담사는 그 약자를 알 수가 없어서 상담 자체가 안되는 경우가 많아요. 상담이 제대로 되어야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서비스가 지원이 되는데 말이죠. 둘째 아이가 농아인전담복지관으로 실습을 나갔을 때 농아인과 건청인 상담사간의 통역을 해주면서 특수학교 상담사로 가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어요.
제 전공은 정신지체 쪽이지만 아이가 농상담사가 되면 농아인들이 상담과 함께 와서 쉴 수 있는 카페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둘째 아이를 저희 가정에 보내주신 게 실수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맡겨주신 것임을 많은 분들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글. 김정아,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