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문제는 인간에게 던져진 중요하고도 심오한 주제이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가에 상관없이 언제 인간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기에 끊임없이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와 이유들을 찾아 나가려 한다. 영화 ‘부활, 그 증거’는 고통 때문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고통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목적을 일깨워주는 여정을 담고 있는 다큐 영화이다.
삶과 죽음, 어둠과 빛
영화의 첫 시작은 인도 바라나시로부터 시작된다. 인도 전역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힌두인의 성지 바라나시는 매일 같이 장례가 치러진다. 윤회를 믿는 힌두교에서는 삶은 고통이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구원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끊임없는 의식과 고행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고, 갠지스강에 몸을 담근다. 죽어서 갠지스강 물에 잠긴 시체는 화장되어 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다고 믿는다.
삶은 고통이기에 영원한 죽음을 소망했던 사람들과 달리, 부활을 믿었던 로마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핍박을 피해 스스로를 어둠 속 지하 감옥인 카타콤으로 이끌었다. 카타콤은 그들의 피난처이고 예배 처소이자 묘지였는데 벽에 새겨진 비문들에는 어둠 속이었지만 ‘빛’을 품고 살았던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이었지만 그들은 영원과 맞닿아 있었기에 ‘빛’의 흔적을 남겼다. 온갖 핍박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다.
*카타콤이란?
헬라어 ‘카타콤베‘(‘낮은 지대의 모퉁이‘란 뜻)에서 유래한 말. 지하 동굴에 기독교 박해를 피해 마련된 기독교 초창기 성도들의 피난처요, 예배처인 동시에 지하 묘지를 뜻한다. 깊이 10-15m, 폭 1m, 높이 2m 정도의 지하 통로를 종과 횡으로 뚫고 계단을 이용해 여러 층으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상처와 상흔, 부활의 증인
인도의 또 다른 도시 첸나이, 이 곳에는 부활한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었던 도마의 흔적이 있다. 영화는 첸나이 곳곳에 남겨진 도마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의심 많은 도마가 이 먼 인도 땅에 와서 순교하게 된 이유는 그가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죽음을 이긴 흔적이 자신안에 있었던 도마,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순교로 삶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영화의 시선은 서울의 한 병원에 다다른다. 피아노 연주자로 안정적인 삶을 살던 천정은은 어느 날부터 몸에 시작된 통증으로 병원을 찾는다. 유방암 말기라는 진단과 “너무 늦었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에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중, 친한 친구에 의해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고 그 동안 자신이 살았으나 ‘죽은’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5년 동안 80회가 넘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만나 부활의 소망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천정은: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의 저자 (규장 출판)
영화 속에서 이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는 현대를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고 일컫는다. 전쟁과 질병이 일상이었던 이전 시대에 죽음이 강조가 되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우리 삶 주변에서 ‘죽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삶이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듯이, 삶과 죽음은 연결되어 있음을 영화를 보는 내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볼 수 없다 해도 오늘은 누군가가 태어난 날이자 누군가가 죽은 날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며, 그 죽음의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음을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닌 영원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오늘의 하루가 값지고 더욱 귀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더 나아가 소망의 이유를 발견한 자 답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부활의 삶이 아닐까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