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안녕하세요, 선생님. B&R 독자분들께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2009년부터 약 8년 동안 미국 뉴욕의 할렘에 있는 데모크라시 프렙 공립학교(Democracy Prep Public School)에서 고등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쳤던 ‘이정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학교를 그만두고 새로운 꿈을 좇아 다시 대학원생의 자리에 서게 된,. *“Lion Chaser”예요.
데모크라시 공립학교는 한국어가 필수!
Q 한국어 선생님으로 일하셨던 데모크라시 프렙 공립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사실 데모크라시 프렙 공립학교는 MBC에서 방영된 ‘우리 학교는 한국 스타일’과 ‘KBS다큐 공감’에서 할렘의 한국 교육, 기적을 만들다’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면서 한국에 소개가 되었어요.
데모크라시 프렙 공립학교는 차터스쿨(Charter School)이에요. 차터(charter) 공립학교 네트워크는 한국에는 좀 낯선 시스템이예요. 일반 공립학교처럼 정부나 주에서 예산을 받지만, 학교의 교과과정과 예산 운영 등은 사립 재단 처럼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공립학교예요. 유치원 부터 고등학교 3학년인 12학년까지의 과정이 있고, 데모크라시 프렙 네트워크 안에 22개의 초중고등학교 캠퍼스가 뉴욕, 뉴저지, 워싱턴 DC 뉴올리언스, 라스베가스에 있어요.
이 학교들의 공통점은 흑인과 라틴계 사람들,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저소득층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에요.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질 높은 교육과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기 위해 설립된 학교예요. 멋지죠?
이 22개의 캠퍼스 중 외국어 과목이 교육과정에 들어있는 7 개의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웁니다. 모든 고등학생이 3-4년 동안 한국어를 졸업 필수 과목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흔히 배우는 스페인어나 요즘 주목받는 중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만 제공하니 매우 드문 일이죠.
저는 2009년에 첫 한국어 교사로 기적처럼 채용이 되어 한국어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2016년 중반까지 한국어 교사와 한국어프로그램 과장으로 일했어요. 학교 자랑은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한국교육의 장점, 할렘에 입성하다
Q 왜 할렘에 있는 학교에서 한국어를 선택한 건지 궁금하네요.
할렘에서 왠 한국어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학교 설립자인 세스 앤드류가 당시 여자친구, 지금의 아내인 라나 잭이(어머니가 한국분. 아버지는 주한미군) 한국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라나를 만나러 한국으로 갔었어요.
그러다 라나와 같이 원어민 교사로 천안에 있는 중학교에서 약 1년정도 영어교사를 했어요. 그 때 한국 사람들의 배움에 대한 열심,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등에 감동을 받고 뉴욕에 돌아와서 본인의 학교 설립을 준비하면서 한국교육의 장점을 받아 들이고 거기다 본인이 생각한 이상적인 학교설립 가치를 반영해 데모크라시 프렙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어를 택하게 된 것도 있고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인에게 한국어는 배우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잖아요. 스스로 결심하고 노력하면 어떤 것이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배우기로 한 거죠.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면 다른 무엇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주고 싶었어요. 미국에서 쉽게 배울 수 있는 스페인어를 넣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3년이란 시간 동안 꾸준히 노력해서 만들어가는 성취감과 자신감은 학생들이 삶을 살면서 또 다른 어려운 과제들이 다가와도 도망가거나 안주하려 하지 않고 ‘나도 계속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연기를 전공하던 예술가가 교사로…
Q 처음부터 교사가 되는게 꿈이셨나요?
흠… 이거 답이 무척 길어지는 질문인데 들을 자신 있으세요? 하하… 사실 제 대학 전공은 대학로 무대에서 굶어 죽더라도 진정한 예술만 고집하는 연극 배우를 꿈꾸는 연극이었어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연기 전공이예요. 마지막 학기에 학기 공연을 기획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예술기획을 공부하려고 브로드웨이가 있는 뉴욕으로 유학을 위해 미국에 처음 왔어요.
막상 유학을 오니 당장 시작하는 예술기획 전공 수업은 없고 무대감독 수업만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대 감독 공부라도 시작해야겠다 싶어 전공을 바꾸게 되었죠. 나름 적성에도 맞고 좋았어요.
학부를 졸업하고 유명한 줄리아드 대학에서 무대감독 인턴으로 선발되어 꿈같은 시간을 보냈어요. 전 제가 브로드웨이에 있으면 세상을 누비고 다닐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턴십이 끝나고 큰 극장들과 면접을 보니, 실전 경력이 너무 짧으니 일 년 정도 미국 내 공연들을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고 오면 받아준다고했어요. 사실 공연 쪽에 일하는 분들은 공연을 따라 돌아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전 그때 이미 가정이 있었어요. 가정을 떠나서 내 꿈만 쫓는 건 아닌 거 같아 두 번도 생각 안 해보고 제 꿈을 접었어요. 엄마의 반대와 죽도록 싸워가며 시작했던 연극의 꿈이 어쩜 그리 한순간에 접어지던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요.
하지만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어요. 브로드웨이의 꿈을 뒤로하고 삶의 목적이나 꿈같은 단어들은 제 생활에서 아예 사라져 가고 평범하게 살았어요. 남들도 다 이렇게 사니까 저도 꿈은 접고 그냥 하루하루 살았어요.
조용히 아이를 기르면서 직장을 다니는데 누군가가 안정적인 도서관 사서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말에 대학원에서 도서학과를 전공하게 되었죠. 그런데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제 삶에 큰 변화가 생겨 대학원을 졸업하고나서 할렘에서 한국어 교사가 되어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고, 다시 꿈을 꾸는 삶을 제 가슴에 품게 되었어요. 제가 누구인지 사춘기 때도 못 찾았던 제 정체성을 찾게 되었어요. 그렇게 제가 미국에 오게 되었고 학교란 곳에 발을 들이게 되었네요. 생각과는 너무 다른 길이죠?
할렘, 그 낮은 땅
Q 할렘은 위험한 지역인데, 여자로서 그곳에서 힘들지 않으셨나요?
뉴욕 할렘은 맨해튼 위쪽 지역으로 오랜 시간 동안 범죄와 빈곤의 대명사로 불리는 곳이에요. 저소득층 흑인과 라틴계 또 아프리카 등에서 온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죠. 예전보다 범죄율이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빈민층이 많아 골목골목 위험한 곳도 있고 노숙자들도 많이 있어요.
저는 사실 겁이 많아서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녔어요. 아무래도 학교에서 처음 일했던 2009년에는 아시아 사람들이 흔치 않은 곳이라 학교 근처를 걸어가면 성희롱하듯이 이상한 말을 던지며 꼬시려는 사람들이 늘 있었죠. 그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대하려고 눈을 마주치면 자기가 꼬시는 것에 맞장구치는 줄 알까 무서웠고, 눈을 피하면 사람을 무시한다고 화를 낼까 두려웠어요.
겨울엔 일찍 어두워지는데 방과 후에 주차장까지 걸어갈 때면 늘 긴장이 됐어요. 안 무서운 척 귀에 이어폰을 꼽았지만 주변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고 음악은 틀지 않았고 누군가하고 전화하는 척하면서 ‘내가 지금 어디 걷는 중이다’ 라고 크게 말하고 다녔어요.
언젠가는 주차된 제 차 주변에서 마약을 거래하는 모습을 보고, 차로 가지도 못하고 길을 되돌아 오기도 했어요. 몇 년 전에는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 전혀 지나가는 행인의 머리를 가격해서 쓰러뜨리는 게임(?)이 유행한 적도 있었어요. 그때 저는 여러 캠퍼스를 걸어서 방문했었는데 뒤에서 누가 확 뛰어 올까 봐 바닥의 제 그림자를 열심히 보면서 걷기도 했어요. 누가 뒤에서 다가오는지 지켜 보느라고요.
어느 날은 퇴근하려고 차에 막 탔는데 웬 남자가 느닷없이 차 문을 열고 보조석에 앉는 거예요. 자기도 태워달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놀랐지만 쳐다보니 청소년이라 제가 그 아이의 눈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내리라고 했죠. 그랬더니 바로 꼬리를 내리면서 순순히 차에서 내리더라고요. 그날 운전해서 집에 오는 길 내내 몸이 얼마나 바들바들 떨리던지… 한국에선 할렘을 무서운 곳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할렘보다 뉴욕의 사우스 브롱스나 뉴저지의 캠든이 훨씬 더 악명높고 위험해요. 뉴저지 캠든은 아예 차 밖으로 걸어 다니질 못하거든요. 그곳에도 우리 학교 캠퍼스가 있어서 자주 다녔어요.
겁이 많다보니 걸어다니거나 운전하며 주변과 사람들을 아주 자세히 관찰했어요 . 관찰하다 가 눈에 보이는 안타까운 사람들과 상황이 있으면 기도하며 하나님께 더 많이 의지하게 되었어요.
하루 아침에 유명 학교로 알려지다
Q 한국어 프로그램을 처음 만드셨을 때 이야기를 해주세요.
첫해에는 정해진 교과서도 없어 어렵게 수소문해서 구한 한국어 시험지 복사본 한 장이 프로그램의 전부였어요. 그 시험지는 주 정부에서 주관하고 장차 저희 아이들이 3년 뒤에 봐야 하는 *LOTE (Language Other than English)시험지였어요. 커리큘럼도 없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던 상황이라 달랑 그 시험지 한 장을 기본으로 하루하루 다음 날 가르칠 수업자료를 인터넷을 뒤져가며 만들었어요. 저도 한국어 교사는 처음이었고 아이들도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언어를 배우려고 하니 난리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애들도 고생이 많았어요.
일년이 끝나갈 무렵 아이들에게 한국시 몇편 낭독하고(물론 알아듣는 사람은 저와 손님으로 온 한국분들 뿐이었지만) 다른 한국 기관들의 도움을 받아 풍물놀이를 가르쳐서 ‘한국의 밤’이라는 초라한 학교 행사를 했어요.
3년 차가 되었을 때 대학 때 봉산탈춤을 추었던 학우들 생각이 나서 저희도 탈춤을 추겠다고 탈춤 선생님을 모셔 왔어요. 돈이 없어서 아이들이 탈을 만들고 이것저것 발표하는 한국의 밤 행사를 가졌어요. 그날 뉴욕 한인 신문사 기자 한 분이 학교 설립자와 인터뷰를 하고 저녁 행사까지 보고 가셨어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아주 크게 일이 터졌죠. 긴 보도 기사와 아이들의 탈춤 사진이 미국 지역신문이 아닌 한국의 대형 신문사의 조간 1면에 딱 실려있지 않겠어요? 당시는 한국 교육이 신랄하게 비판을 받던 시기였는데 한국이 그리 비판하던 한국 교육이 할렘 아이들의 인생과 사회를 바꾸었다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린 거죠. 그 기사가 나고 한국의 온갖 미디어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여러 기업에서 우리 아이들의 한국 수학여행을 후원하겠다고 나섰어요. 그때 MBC의 “우리 학교는 한국 스타일”이라는 다큐멘터리도 찍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방식과 타이밍은 정말 상상을 초월해요.
시간이 지나면서 커리큘럼도 만들어지고 클럽 활동으로 한국무용, 케이팝 댄스, 시조 클럽, 태권도, 코리안 클럽 등이 운영되었어요. LOTE 시험 합격률도 90-100%가 되어 학교 체육관에서 하던 ‘한국의 밤’ 행사가 아예 할렘 길을 막아놓고 할렘 한가운데에서 한국을 마음껏 자랑하고 알리는 ‘한국 거리 축제’로 자리 잡았어요. 이제 그 행사는 몇 천 명의 방문자들이 와서 무료로 한국음식도 먹고 한국문화를 배우고 아이들은 배우고 연습한 것들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죠.
Q 사실 흑인이나 이민자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춤을 추고 한국 행사를 한다는 게 참 신기한 일인데, 학생들이 잘 따라주었나요?
첫 해에는 거부반응이 많았죠. 미국 내에서 많이 배우는 스페인어나 불어도 아니고 요즘 주목을 받는 중국어도 아닌 한국어라니…. 한국계 학생도 한명 없는 학교에서, 또 한국 사람이 살지도 않는 지역에서 한국어를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 외국어로 배운다는 것을 아이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했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학생 본인들이 조금씩 한국에 대해 알아가면서, 처음에 가졌던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지며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걱정하던 주변 선생님들이나 학부형님들과 리더십들은 시험성적이나 호응도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거부감이 사라져갔고요.
한국의 ‘정’을 배우고 가는 수학여행
Q 매년 한국으로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오는데 아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매년 각 학교별로 11학년 학생들을 심사하고 선별해서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가요. 직접 가서 한국의 문화를 실제 체험하고 오는 거죠. 한국 수학여행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배웠던 그 어떤 수업보다 몇 백 배 귀한 것들을 깨닫게 해줘요. 수업 때 배웠던 문장들을 실제로 한국에서 듣고 본인들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성취감과 자신감을 주거든요. 교실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살아있는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니까요. 전 사실 이보다 더 엄청난 것을 아이들이 경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정’이에요.
한국 수학 여행 중에 자매학교를 방문해서 2박 3일의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한국 친구 집에서 홈스테이를 해요. 그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받는 조건 없는 사랑에 아이들이 큰 충격을 받아요. 미국처럼 개인주의적인 나라에서 가족들과 사회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학생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의 온전한 보호와 사랑로 인해 사람과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되는 거죠.
실제로 어떤 학생이 여행을 다녀와서 자작시로 자기의 경험을 발표했는데 그 시 제목이 ‘정’이었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그 집에서 안전함을 느꼈다고 하더군요. 그 시를 들으면서 전 가슴이 짠하고 또 감사했어요. 아이들은 그 짧은 여행을 통해서 ‘베풂’을 배우고 ‘인간애’를 느껴요. 미국에선 ‘흑인’ ‘저소득층’ ‘이민자’ 등의 편견을 가지고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데 한국에 오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귀한 존재’로 대해 줌에 감동을 받아요. 그래서 학생들도 나중에 기회가 온다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섬기고 싶다는 넉넉함까지도 배워온답니다. 이렇게 한국 수학여행은 아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줘요.
Q 아이들을 가르치시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으셨나요?
많죠. 그중 몇몇을 꼽는다면 아프리카 이민자 가정의 학생이 기억나네요. 공부도 잘하는 단정하고 성숙한 모범생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방이 아닌 비닐봉지를 달랑 들고 왔더라고요. ‘가방은 어디에다 두고 비닐이 웬 일이니?’ 라고 물어보니 세 들어서 살던 집에 불이 나서 집이 다 타버렸다는 거예요.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물건을 챙기지 못해서 비닐에 연필 한 자루 넣어 학교를 온 거였어요.
제가 그 학생이었다면 전 학교를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온 가족이 길바닥에 나 앉게 생겼는데 학교가 웬 말인가요? 그런데 이 학생은 학교에 왔어요. 그 아이에게 교육은 가족과 자신을 살게 할 최선의 방법이자 도구였던 거예요. 이 학생은 대학에 진학해 좋은 곳에 취업해 가족들에게 집을 선물하는 게 꿈이었어요. 실제 아주 좋은 대학교에 진학했어요. 그 꿈 이루고도 남을 겁니다.
어느 날은 제가 화장실 앞을 지나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여자애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아이는 울고 있고 다른 두 명은 그 아이를 위로하고 있더라고요. 그 울던 아이를 빈 교실에 데리고 가서 진정시키고 난 뒤에 이유를 들어보니 밤에 아빠와 오빠가 싸우다가 오빠가 아빠를 칼로 찌르고 경찰을 피해 도망을 갔다고 하더라고요.
비정상적인 삶의 혼돈 속에서 이 학생은 어찌할 바를 몰라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안전한 학교로 달려온 거였어요. 규율도 엄하고 공부를 너무 시켜서 학교가 아니고 감옥이라는 불평도 많이 들었지만, 아이들에게 학교는 자기의 현실보다 더 안전한 곳이었던 거예요.
마지막으로 제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학생은 어렸을 때 부모님 이혼으로 엄마와 강제적으로 헤어진 상처 때문인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어요. 사춘기를 겪을수록 증상이 심해져서 자살 충동도 자주 느끼고 학업성적은 나날이 하향 선을 그리면서 졸업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던 아이였어요. 9학년 때부터 저를 엄마처럼 졸졸 따라서 자주 상담도 하고 밥도 사주고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서 빠져나오도록 기도해 주던 아이였어요.
불가능해 보이던 고등학교 졸업도 하고 4년제 대학으로 진학도 잘했어요. 얼마 전에 저희 동네인 뉴저지까지 와서 같이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며 이야기했어요. 제가 대학 입학 선물로 조금 늦었지만, 성경책을 선물로 줬어요. 제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생명의 선물을 준다고 하면서 꼭 읽으라고 했지요.
Q 가르치면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으세요?
왜 없었겠어요? 첫 1년을 마치고 여름방학에 한국에 돌아왔어요.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 날, 엄마 앞에서 펑펑 울었어요. 끔찍한 전쟁터로 다시 죽으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무섭고 끔찍했어요.
처음에는 아이들한테 인종차별적인 대우도 수도 없이 받았고 과목 자체가 수학이나 영어, 과학처럼 모든 학생이 잘하고 싶은 과목도 아니어서 가르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긴 이민 생활을 했는데도 아이들에게 받는 차별이 어른들에게 받는 차별보다 훨씬 더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가 되었어요. 또 제 능력과 지혜가 부족해서 하루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보니 매일 4시간씩 밖에 못잤어요. 잠이 부족해서 몸이 힘든데도 그만두진 못하겠더라고요.
진정한 꿈을 발견하게 하기 위한 그분의 섭리
Q 사실 그만둔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었을텐데 굳이 이 일을 계속하신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건 ‘섭리와 응답’때문이에요. 답을 하려면 더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데요. 음… 제가 아까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연극의 꿈을 접었다고 했죠? 그런데 대학원 졸업을 얼마 앞두고 인생에 또 큰 굴곡길을 걷게 되었어요. 졸업과 동시에 이 타국에서 암담한 싱글맘의 길을 가게 되었어요. 세상에서 말하는 인생의 바닥을 온몸으로 치고 나니 참 두렵고 붙잡을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저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부터 늘 교회에 나갔지만 고등학교 이후로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서 살았어요. 미국에 와서도 교회를 가끔 나갔지만, 하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제가 얼마나 강팍했던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고요. 먼 길을 돌아왔지만 제 자리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요.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 교제하고 나서야 숨을 쉬게 되었어요. 납작했던 폐에 공기가 들어와서 부풀 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리면서 제 상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었어요.
그렇지만 당장 애랑 먹고 살아야 하는데 전 아무것도 없었어요. 대학원 수업 마지막 날, 오전에는 인턴십하던 공공도서관에 출근하고 저녁에는 인턴십 하면서 배운 점을 발표하는 수업이 있었던 날이에요.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어요. ‘나와 우리 가족을 살려달라고, 우리를 보호하심을 믿으니 두렵지 않게 해 달라고, 그리고 정말 사랑하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울면서 감사로 기도를 마치니 맘이 평안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내심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했어요. 그 당시 뉴욕 시에 경제 붕괴가 일어나서 공공도서관 사서들이 대규모로 해고가 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나만은 채용해 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어요. 그런데 도서관에서 저에게 정말 고맙지만 채용하지 못해서 너무나 아쉽다며 포옹만 해주더라고요.
그래도 실망하거나 흔들리지 않았어요. 아직 저에겐 대학원 마지막 수업이 남았었으니까요. 교수님이 저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실 거라고 기대했어요. 아무 근거도 없이 말이예요. 수업이 끝나니 학생들이 신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르르 강의실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교수님은 절 부르시거나 말을 걸지도 않으셨어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구나’하고 힘없이 강의실 문밖으로 한발을 내디뎠는데 누가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너 정진 (JJ)이지?”
“응”
“너 한국 사람이야?”
“맞아.”
“너 졸업하고 바로 일할 거야?
“아니, 아직 일자리 찾는 중이야.”
“잘 됐다! 우리 학교에서 파트타임 한국어 선생님과 도서관 사서를 찾는데 넌 한국 사람이고 사서 공부했으니까 딱 맞는데… 지원해 볼래?”
“오! 그래? 그래! 지원 해볼래!”
이렇게 데모크라시 프렙과의 인연이 시작된 거예요.
Q 안 그래도 어떻게 데모크라시 프렙에 들어가게 되셨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놀라운 스토리가 있었네요.
교육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제게 학교를 소개해 준 그 친구는 저와 대학원에서 같은 수업을 들었지만 3분 정도밖에 이야기를 안해본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그 학생이 스치듯 만난 저를 기억하고 인턴십 발표하는 동안 저를 소개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아니, 그런 생각을 품게 하신 그분이 있으셨던 거죠. 사실 그 친구는 데모크라시 프렙 중학교 리더 중의 한 명이었고 고등학교의 한국어 프로그램을 맡아서 책임질 리더였어요.
그렇게 전 전문교사로서 자격증도 없이 뉴욕에 있는 공립학교에서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갖게 되었어요. 그 친구는 저에게 교육의 가치와 교사의 의무, 수업자료 만들기, 수업 관련 데이터 분석 등 할렘의 고등학교 교사로서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인내와 사랑으로 가르쳐 주었어요. 제겐 은사와 같은 친구였어요. 저와 함께 울어주고 부족한 저를 위해 한국어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몇몇 어른들과 무례했던 학생들로부터 보호막을 쳐 주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떠나고 난 뒤부터는 저 스스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그때까지는 학교일이 저와 제 가족이 살아남기 위한 호구지책이었어요. 또 아이들 앞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겠다는 오기로 버텨온 거였죠.
1년이 지나자 학교에서 다음 학년의 오퍼 레터를 주더군요. 저희 학교는 매년 재계약서처럼 오퍼 레터를 일년에 한번 줍니다. 사인해서 제출하면 다음 해에도 일을 할 수 있는 건데, 물론 이 일이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으로 주신 것이지만, 알고 싶었어요. 나를 살려주신 건 정말 감사하지만, 도대체 왜 할렘이냐고, 내가 여기서 뭘 해야 하는 건지 알려달라고… 한국어 교사로서 지식도 경험도 너무나 부족한 제가 학교에 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거든요.
학교에서 더 이상은 답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고 재계약 여부를 30분 후에 알려달라고 했어요. 답답한 마음에 학교 마당에 나가 울면서 기도했어요. 답을 달라고… 그런데 그때 학교 맞은편에 저소득층이 모여 사는 영세민 아파트에서 누가 아주 큰 소리로 욕을 퍼붓길래 쳐다봤어요. 아파트 입구에 한 1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갓난아이를 쓰레기봉투 처럼 집어서 던지듯이 어떤 소녀에게 건네더라고요. 그 소녀는 15-16살쯤으로 보였는데 아이를 받아서 떠나가는 데도 그 남자의 욕과 저주는 계속되었어요. 그걸 멍하게 바라보는데 제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보냈다. 이 종이 (오퍼 레터)가 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지킨다.”
그 이후로는 매 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사인을 했어요. 월급이 얼마인지보다 제 삶에 목적이 생겼기 때문에 제 태도와 생각이 달라진 거죠.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아이들의 상황을 느끼게 되었고, 아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이게 제가 할렘에서 일하게 된 스토리예요. 제 삶의 심폐소생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저와 할렘의 아이들을 위한 러브스토리이기도 해요.
Q 사람들은 누구나 편견이 있잖아요. 특히 한국인들은 백인보다는 흑인들에 대해서 더 편견이 있는 거 같아요. 사람에 대한 그런 편견, 어떻게 생각하세요?
맞아요. 많은 나라들이 편견이 있지만 한국은 조금 더 흑인들에 대한 편견이 많은 것 같아요. 피부가 검은 사람은 왠지 못 배운 사람 같고 범죄를 저지를 것 같고, 무섭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이는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도 크다고 생각해요. 흑인들을 그렇게 평가하는 시각은 다민족이 모인 미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미국 내에 계시는 한인들 중에서도 흑인들을 할리우드 영화에서 묘사하는 범죄자들로만 취급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소득층 흑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많은 한인들이 사업을 하세요. 흑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면서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 우리도 유색인종으로 미국 내에서의 차별에 마음 상해하면서 다른 유색인종들은 우리 밑으로 보려고 하는 시각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도 인격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교육을 받고 싶어 하고, 꿈을 가지고 존중 받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싶어 해요. 그리고 그들도 당연히 그럴 자격과 능력이 있고 또 권리가 있어요.
헨리 나우웬(Henri Nouen)이 쓴 ‘영성 수업’이란 책에 이런 예화가 나와요.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밤과 새벽의 경계를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물었더니 제자들은 샛별이 뜨면 혹은 해가 떠서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새벽이 아니냐고 답을 했지만 랍비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어요. “그건 다른 인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너희 형제나 자매를 알아볼 만큼 너희 안에 빛이 충만할 때다. 그때까지는 밤이고 아직 우리에겐 어둠이 있다.”
우리 모두 오래 곱씹어보고 나 자신을 비춰봐야 할 글이라고 생각해요.
Q 학교에서 일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다고 생각되실 때는 언제였나요?
당연히 졸업식 날 무대에 선 아이들을 볼 때예요. 저희는 졸업식 때 학생들이 합격해서 가게 된 대학을 앞에 나와서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어요. 축제와 같은 시간이죠. 그리고 그 무대에서 아이들이 들어가고 싶었던 대학에 들어가 환호성을 지르며 대학 이름을 외치는 모습을 봤을 때 보람을 많이 느껴요. 그리고 두려움과 실패와 무관심에만 익숙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두려워도 도전하고 싶어 하고, 자기의 꿈을 눈을 반짝이면서 말할 때 가장 뿌듯해요.
영원히 부를 그분의 러브스토리
Q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으시다면요.
오는 9월부터 콜럼비아 교육대학원에서 다시 공부하게 되었어요. 국제교육개발을 공부할 예정입니다. 포커스는 난민교육(Emergency Education) 쪽이에요.
우선 학교를 최선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싶어요.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이뤄질지는 지금은 모르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고아와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서 기독교 기숙사 학교 네트워크를 설립하고 섬기고 싶어요. 그 곳에서 아이들이 하나님을 깊게 만나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리더로서 좋은 교육을 받고 또 그 나라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추수 일꾼들이 되길 바라요. 물론 고아원과 병원 설립도 함께 꿈을 꿉니다. 이건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 소망이고요. 제 삶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저를 향해 품으신 그 소망의 길에 제 삶이 있기를 기도해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이 제 꿈이에요.
*LOTE
뉴욕주에서 치뤄진는 regents 시험중 외국어시험.
*Lion Chaser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이 두려워서 안전한 삶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소명과 계획을 발견하고 도리어 쫓아가 하나님 안에서 성취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