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월곡동 88번지, 속칭 미아리 텍사스라고 불리는 동네에서 ‘건강한 약국’을 운영하는 이미선 약사님을 비앤알에서 만났다. 집창촌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약국을 하며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의 언니가 되어 상한 몸뿐 아니라 마음의 이야기까지 들어주시는 그녀의 비앤알 스토리를 들어보자.
Q.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미아리 텍사스촌이 어떤 곳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미아리라는 이름하고 텍사스라는 이름이 참 안어울리죠? 1960년대 말 집창촌이었던 종로 3가와 양동 지역에 폐쇄되면서 이쪽으로 옮겨왔어요. 1980년대 통행금지 폐지와 한국경제 발달로 인해 성매매를 하는 집창촌이 활발하게 운영되었어요.
청량리 588, 천호동 텍사스와 함께 서울의 3대 집창촌이었어요. 2004년 성매매금지특별법과 미아리 일대가 재개발이 되면서 많은 집들이 문을 닫고 현재는 80곳 정도가 운영 중이예요. 사실 다 불법인 건데 정부가 그냥 방치하고 있는 상태죠. 청소년 금지구역으로 지정은 되었지만 간판도 없고, 마치 오래된 시골 마을처럼 내버려진 곳이예요.
Q. 왜 약사가 되기로 하셨는지 궁금해요.
약대를 간 이유는 딱 하나 경제적인 이유였어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 아빠가 보증을 잘못 서고 사기를 당해서 집안이 쫄딱 망했어요. 그래서 저는 대학을 포기했는데 저희 어머니가 참 현명하신 분이었어요.
제가 큰딸인데 어머니께서 네가 대학을 가서 동생들과 집안을 위해서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어려운 형편에도 제가 대학에 가게 되었어요. 전 다행히 공부하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 숙명여대 약대에 들어갔어요
고 1때 집이 망해서 아주 좁은 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는데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어요. 담임선생님이 제가 공부도 안하고 부쩍 달라진 것을 보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눈치를 채셨어요. 제게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보셔서 집이 망해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갈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알바라도 해서 대학을 가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담임 선생님이 소개시켜 주신 과외를 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학교를 다니면서 학비를 버는 제 알바 인생이 시작되었어요.
Q. 약사님이 미아리가 고향이라고 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이 곳에서 지내신 건가요?
이 지역이 제 고향이어서 모든 기억이 다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동네가 안무섭고, 안더럽고, 안 불편했어요.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어요. 제 그 당시 소망은 남편을 위대한 혁명가로 만드는 거였는데 우리 둘의 성향이 너무 달랐어요. 저는 남녀 평등주의자인데 남편과는 그 부분에 의견차가 있어서 결혼 초부터 힘들어하다 결혼한지 7년만에 이혼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 친정인 이 동네로 다시 돌아온 거예요.
그 때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아이를 키우면서 약국을 해야 하니까 친정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어요. 그때가 1996년, 지금으로부터 23년전이에요. 처음엔 미아리텍사스 주 출입구였던 쪽에 약국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 쪽이 재개발이 되어서 지금 이 자리로 15년 전에 왔어요.
처음 약국을 할 때는 이 일대에 성매매 업소도 많았고 미성년자 성매매하는 어린 친구들도 많이 있었어요. 김광자 경찰서장이 2000년 미성년 성매매 금지를 했죠. 그 당시 제일 번창했던 때는 이 지역에 500개가 넘는 업소가 있었어요.
Q. 약사님은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숙대를 다니면서 기독학생회에 들어갔어요. 저는 예수라는 인물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저는 종교가 없었어요. 어느 날 기독학생회 선배 언니가 예수님을 소개해주었어요.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고 평생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창녀들, 고아들, 천대받던 어부들과 함께한 위대한 혁명가라는 얘기를 듣고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교회는 다니고 예수를 만났지만 그 때 만났던 예수는 나만의 예수였어요.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닌 제가 좋아하는 부분부분들만 보고 쫒아 다녔던 거죠.
그 당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찬송가는 교회에서 한번도 부른 적 없는 ‘뜻없이 무릎꿇는’ 이라는 찬송가인데 사실 완벽한 혁명가요죠. 사실 뜻없이 무릎 꿇는 것은 ‘맹종’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맘대로 끌고 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의지로 오라는 거 잖아요. 그래야 내 아들 내 딸 자격이 있으니까요.
그러다 제 신앙관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서예요. 내 영혼의 무릎이 꺽이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분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셨는데, 하나님의 그 많은 열심에 답하기 위해 너는 하나님께 다가가 보았는가?”하는 말씀에 많은 것을 깨닫고 그분을 온전히 제 삶에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Q. 어떻게 성매매 업소 여성분들을 섬기기 시작하신 건가요?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아요. 그 당시 이곳에 있던 미성년자 친구들, 얼굴에 솜털이 가득한 친구들 대부분 돈때문에 집을 나온 친구들이었어요. 부모에게 맞고 나온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런 친구들을 보면 피임약이나 피임법을 알려주었어요.
아프지 않은 친구들이 없었어요.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었어요. 여기 있는 친구들 손을 보면 왼쪽 손목에 ‘주저흔’이라고 불리는 상처가 있는 친구들이 많아요. 자살을 한 흔적이예요.
사실 외과용 매스 외에 칼로 자신이 손목을 그어서 죽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도 그런 시도를 한 것은 사실 그 친구들은 ‘모두 나는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거거든요. 이런 걸로 죽을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칼로 긋는 거에요.
*주저흔 – 자살하려는 사람이 한 번에 치명상을 만들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자해하여 생긴 흔적
친구들과 접하면서 그 친구들의 히스토리를 들어보면 누구도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어요. 자기가 사치를 부리고 싶어서 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부모나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혹은 자식때문에 오는 미혼모 친구들도 있어요.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요.
관공서나 은행에 가는 것도 무서워해요. 이 구역 앞의 도로가 이 친구들과 세상과의 보이지 않는 경계 예요.
‘나라도 이 경계를 넘게 해주자’ 라는 마음과 ‘나라도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주자’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친구들과 얘기할 때 얘네들이 욕하면 저도 같이 욕을 해요. 친구들에게 성매매 하는 것을 잘했다고 얘기하지 않지만 ‘부모 병원비 위해서, 동생 학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까 괜찮아 너희들 만의 잘못은 아니야’라고 말해 줘요. 부모에게도 사회에서도 버림받은 친구들이라 항상 외로워하고 애정에 굶주려 있어요. 손님으로 온 남자들이 조금만 잘해주면 금방 속아 넘어가고 애정결핍때문에 1인1개를 키워요. (한 사람이 개 한 명을 키운다는 말)
Q. 정말 많은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일이나 사람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2005년 3월에 여기 방화로 불이 났을 때 죽은 친구가 있었어요. 제가 약국 문을 열면 바로 일하는게 보이는 친구 중 하나였는데 그 중에 고아인 친구가 있었어요. 남편 만나 결혼하고 이혼하면서 양육권을 가져오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에 돈 벌러 들어 온지 15일 만에 화재로 죽었어요. 불이 난 걸 보고 죽은 친구들의 시신도 보고 그 가족들도 보고 했던 그 기억들이 제겐 잊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20년 넘게 이곳에서 일하면서 여기서 일하다 사회로 나간 친구는 한 세 명 봤어요. 밤에 일하고 낮에 미용학원 다니면서 자격증 따서 나가서 결혼한 친구도 있어요. 한 친구는 여기서 먹고 자면서 (보통은 개인 숙소를 정해서 나가서 돈을 많이 쓰죠.) 밖에 안 나가고 돈 열심히 모아서 시골 총각에게 시집간 친구도 있었어요.
여기 있는 친구들 누구나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렇게 번 돈이니 백화점 가서 돈 쓰면서 계획 없이 살아요. 정말 독하게 마음 먹지 않으면 돈 모아서 여기를 나가기 쉽지 않아요. 그러니 정말 마음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Q. 약사일 뿐만 아니라 ‘건강한 상담센터’ 원장님이기도 하시다고 들었어요.
2012년 사회복지사1급 자격증을 땄는데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땄어요. 자신의 직업이나 상황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람들에 무료복지 상담을 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을 함께 치유할 수 있는 곳이 된 것 같아요. 제가 글 쓰는 재주가 있어서 제약회사 책이나 공모전에도 글을 써요. 제가 출판한 ‘미아리 서신’이라는 책도 있는데 출판사가 망해서 서점에서 책을 팔 수가 없어서 약국에서 직접 책도 팔고 있어요.(웃음) 지금 저희 약국에서 제가 읽었던 좋았던 책들을 꽂아놓고 사람들에게 무료로 대여해주는 일도 하고 있답니다.
Q. 약사님을 지탱하는 삶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제 생활은 매일 똑같고 딱히 달라질 것이 없어요. 다만 달라지는 것은 저 뿐이죠. 제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인데 그건 하나님에 제게 주시는 것 같아요. 좋은 크리스찬이 되려면 좋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훈련이라는 게 말씀 읽고 묵상하는 것도 있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왜 중요하고, 사람이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해요. 제가 학생운동을 할 때 배웠던 것이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옷, 좋은 차, 재산, 명예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결코 앞서지 않음을 인정하는 거죠.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어렵고 힘든 것 같아요. 우린 다 길 위에 있는 거에요. 먼저 간 자 나중에 간 자일 뿐이에요. 뒤에 있다고 길 밖에 있는게 아니에요. 고난과 역경이 없다면 교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꺼에요. 나에게 주시는 많은 연단과 고난과 과제들을 해결해 가면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가는 거에요. 감사함으로 그 길 위에 계속 있는 거예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죠.
Q. 약사님의 비전, 기도제목,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나눠주세요.
이 친구들의 변화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법적 제도적 장치가 수반 되어야 하는 거겠죠. 언젠가 여기가 재개발이 되고 이 친구들에 대한 성매매 여성에 대한 자활과 지원이 민간차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저도 그일에 꼭 참여하고 싶어요. 이 지역 주민으로서 이 친구들을 오래 봐온 사람으로 참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 비전이기도 해요.
그렇게 이곳에서의 제 활동과 생활이 마무리 되면 작은 도시에 저는 약국을 하고 제 동생이랑 시골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제가 손으로 음식 만드는 것도 좋아해서 작은 밥집을 열어서 한끼에 천원 이천원씩 받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주는 식당도 하고 싶어요.
여기가 헐려서 없어 질 때까지 약국을 하겠지만 제 계획은 미아리 텍사스에서 나를 건지신 내가 만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미아리 텍사스 촌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엮어 책으로 내고 싶어요.
글. 김정아,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