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선 작가는 어렸을 때 앓은 열병으로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그림을 그리던 그녀는 큰 귀를 가진 토끼 ‘베니’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2013년에는 망막 색소변성증(시야가 좁아지며 결국 시력을 잃게 되는 병) 진단을 받고 또 한 번의 큰 절망을 겪었다. 소리를 잃고 빛까지 잃어가는 그녀이지만, 시력이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적극적으로 살아내기로 마음 먹고 여행길에 나선다.
식사를 기분 좋게 마친 후에,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걷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저에게 불쑥 말을 거는 거예요. 말을 못 알아 들어서 제가 청각장애인이라고 했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자신의 폰을 주섬주섬 꺼내서 메모장에 써주시더라고요.
“이곳에서 곧 퍼레이드가 열릴 거예요. 30분 후에. 꼭 구경해 보세요!”
그래서 뜻하지 않게 퍼레이드를 보게 되었어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흥겨운 음악이 느껴졌답니다. 다양한 색이 눈을 아주 즐겁게 했고, 힘찬 춤 동작도 가슴을 뛰게 했어요. 모든 사람이 바쁜 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 만큼은 함께 했고, 많은 사람과 악수도 나누면서, 아주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혼자인 게 싫어서 도망갔던 하와이에서 정말 많은 걸 받은 느낌이었어요.
고마워, 하와이!
청각장애를 가졌다고만 말만 했을 뿐인데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듯한 미소를 건내 주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고 말한다.
우간다의 베데스다 메디컬센터. 그곳에서 닷새를 보냈어요. 전혀 바깥 구경을 하지도 못하고, 식사 시간 외엔 전혀 앉지도 못한 채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있었어요. 의료진이 아닌 저는 수술 준비를 맡았어요. 대기실에서 환자분들을 맞이해 순서대로 자리를 안내하고, 차트 확인 후 마취 안약과 동공 확장 안약을 넣어주는 일. 저는 그저 눈빛과 표정으로만 대화를 나눴어요.
‘수술을 기다리는 마음이 어떨까.. 두려울 테지.’
그래서 저는 안약을 넣어드릴 때마다 얼굴을 감싸고 미소를 지어드렸어요. 그런데 그게 통했나 봐요! 수술이 끝난 후 돌아가던 환자분이 저에게 와서 아주 천천히 입모양을 크게 해서 말하는 거에요.
“T h a n k y o u.”
그 입모양을 잊지 못할 거에요. 진한 감동이 밀려왔어요. 오랜 기다림에 지쳤고 수술도 아팠을 테니까요. 정신도 없어서 의사선생님 한테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돌아가기 바쁠 수 있었을 텐데.. 가장 작은 일을 한 저를 잊지 않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하루 종일 앉지 못해 팅팅 붓고 아팠던 다리의 고통까지 말끔하게 잊게 해 준 한마디였어요.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고, 또 받으며 그녀는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 버킷리스트를 차근 차근 이루어 나간다. 남편과 함께 찾은 방콕에서는 슬펐던 기억이 아닌 행복의 기억으로 바뀌게 되는 경험을 한다.
다녀왔던 여러 곳들을 떠올리면, “참 좋았지” 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방콕은 그렇지 못했어요. 마음이 아파서 떠났던, 그리고 그 아픔을 그대로 안고 온 곳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방콕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리고 또 아렸어요.
그곳은 생각하지 않은 채 신혼여행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나는 방콕에 가고 싶어. 당신이 아팠던 곳에 모두 가보고 싶어. 이제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고 확인해주고 싶어”
그래서 방콕으로 얼떨결에 정하게 됐어요.
수완나폼 공항에 도착하자 훅 들어오는 방콕의 향. “제대로 태국에 왔구나!”라는 반가움과 함께 아련함도 밀려왔어요. 혼자 울었던 카페, 슬퍼했던 거리, 식당.. 모두 함께 가보았어요. 그곳을 본 순간,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죠. 그 때의 제 모습과 함께요.
가슴이 아려올 때마다, 남편이 조용히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아주었어요.
“많이 힘들었겠다.” “많이 울었어?” “이제는 슬퍼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으니까.”
한 곳 한 곳 다시 되짚다 보니, 신기하게도 아팠던 기억이 남편과의 좋은 추억으로 덮이면서 이제 방콕은 저에게 더 이상 마음 아픈 곳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책을 넘겨가면서 그녀가 갔던 여행지와 사람들 속에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누구나 생각했을 때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상황 속에서도 작은 기적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도 느낀다. 코로나 19로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요즘, 오늘 하루의 삶을 허락하신 그 분께 감사하며 풍성하고 온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해 본다.
글 임효선 기자.